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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고라니

생명 : 2008.07.23 19:38


밭에서 아기 고라니를 보다.

일주일에 한번 씩 들르는 밭은 언제나 풀로 가득하다.
예초기를 들고 아무리 부지런히 설치고 다녀도 1/3도 채 처리하지 못한다.
뻔히 눈으로 보고도 시간이 없어 그냥 놔두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
그러자니, 가슴께 높이까지 훌쩍 자란 풀무더기는 언제나 목격된다.

예초기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아니 된다.
풀 속에 뱀 아니면 개구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지난번에는 밭을 가로질러 급히 달아나는 뱀을 보았다.
어떻게나 그리 팔팔한지, 뱀으로 술을 담가 약으로 쓴다는 말을 믿겠다.
그 생명력이 충일한 것을 술로 정(精)을 내어 약으로 하겠다는 생각,
그런 생각의 단초를 쫓아가 실행에 옮긴 사람들이라니...
쏜살같이 달아나는 뱀을 보니 아연 그럴 상 싶기도 하다.
그렇다한들, 나로서는 죽을 병에 약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잔인하고 흉측한 모습이 편치 않다.

(※ 정(精)은 흔히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엑기스란 말의 어원은 extract이니,
곧 추출물에 해당한다.
무엇인가 뽑아내었으니, 이는 곧 중심물질을 걸러내었단 의미이리라.
하지만 이 말이 드러내는 개념은 너무 거칠고 너른 폭이다.
나는 이를 대신 정(精)이라고 한다.
영어로 하면 essence 쯤에 해당하나,
원래 精은 ‘찧은 쌀’을 의미한다.
그냥 벼껍질이 붙은 것은 먹을 수 없다,
하니 도정을 하게 되니, 이를 찧는다라고 말한다.
벼를 찧은즉 이제 비로서 하얀 쌀을 얻는다.
쌀(米)이 청(靑)한 것,
여기서 청(靑)은 동방 색이니, 초목이 막 생장할 때의 새로 자란 싹의 색을 의미한다.
그런즉 精은 米쌀+靑 즉 쌀의 생명력을 의미한다.
쌀 자체도 생명을 기르는 으뜸 곡식인즉,
精이란 곧 생명 중의 생명을 가르킨다.)

게다가 아무리 조심해도 부지불식간에 개구리가 결단이 나는 수가 있다.
예초기 소리가 제법 큰 편인데도, 개구리가 미리 알아서 피해주었으면 하지만,
가끔씩 예기치 않은, 둔한 개구리의 희생이 따른다.
나로서도 도리가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농사라는 것이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살생의 연속이다.
벌레 잡아야 하고, 풀 제거하겠다고 멀쩡한 생령 죽여야 하고,
병충해 막겠다고 농약치는 게 일이니,
정말 농가(農家)는 이내 곧 병가(兵家)가 되고 만다.

나야 시험농이니 무농약 농법을 고수하고 있지만,
가끔 마주치는 이웃 농민들은 등에 농약통을 짊어지고 있거나,
기다란 호수로 농약을 분무하고 있기 일쑤다.

높이 자란 풀숲에 고라니가 다녀갔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 2008/07/12 - [소요유] - 상(象)과 형(形) - 補

산에 붙은 밭도 아니기에 고라니가 접근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산은 저편 한탄강을 건너야 있다.
그러니 필시 이 고라니는 이쪽 강변 풀숲이 서식지가 아닌가 싶다.
추정컨대, 이로부터 이탈하여 용케 우리 밭을 찾아낸 것이리라.
우선은 군부대를 끼고 돌아 도로를 건너야 한다.
도로폭이 넓은 곳은 아니지만, 주변에 서서히 집들이 들어서고 있으니,
사람들의 이목도 피해야 하고, 도로를 다니는 차량도 피해야 한다.
그로서는 제법 위험부담이 많은 접근인 것이다.

어미가 가끔 마실 나오는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어제는 사뭇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초기를 돌리고 있는데,
한 5미터 전방에서 무엇인가 풀썩 뛰어 오르며 달아 나는 게 아닌가 ?
소형 애완견 크기의 고라니 새끼였다.
풀 숲에 숨어 있다 놀라 움직인 것이다.
그래도 밭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밭을 벗어나면 이내 한데이기 때문에,
그나마 어디 숨을 데도 없는 것이다.
밭 뺑 둘러 도로이거나, 이웃 밭인데,
거기는 풀이 무성하지 않으니 숨기 마땅치 않은 것이다.

예초기를 끄고, 살펴보니 저쪽으로 도망갔던 녀석이,
다시 애초에 있던 곳과 멀지 않은 곳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뻔히 나를 쳐다본다.
아마, 어미와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가 보다.
설마, 어미를 여윈 것은 아니겠지 ?
슬그머니 내가 자리를 피해준다.
고 녀석이 마치 예전에 기르던 강아지처럼 보인다.

그래 먹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먹어라.
그래 보았자, 네들이 얼마나 더 여기, 살벌한 이곳에 머무를 수 있으랴.
이곳은 머지 않은 장래에 개발이 되지 않으리.
그러지 않아도 멀지 않은 곳부터 집들이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다행이 지금의 내 형편이 그리 박하게 대할 까닭이 없으니,
대접을 야박하게 하지는 않으리.
다만 이웃 밭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새로운 나무를 심었은즉, 삼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로서도 이웃 밭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궁리를 하여야 할 판이다.

그후, 나는 대충 예초기 작업을 마무리하고 끝냈다.
내내, 지금은 여윈 우리 강아지와 아기 고라니가 오버랩되어 겹치며,
마음이 아파온다.
저들을 어이 할 것인가 ?
인간에게 쫓기고 쫓겨, 궁극에 저들이 쉴 곳은 도대체 얼마나 남겨질까 ?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중생의 삶은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가 ?

부처가 말한 고해(苦海)가 실감난다.


※. 참고 글

☞ 2008/07/28 - [농사] - 아기 고라니 2
☞ 2008/08/19 - [농사] - 8년 만에 돌아온 뱀
☞ 2009/07/19 - [농사] - 아기 고라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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