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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과 오광

소요유 : 2016.01.09 20:45


안철수氏가 신당을 차려 나왔는데,

어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세 가지"

"첫째는 대한민국의 최고 인재를 모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정부패에 대해 단호하게, 누구보다 모범을 보이겠다, 셋째 민생을 중심에 두겠다.”


이리 대차게 말을 쏟아내었는데,

유리창에 서린 입김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부정부패 전력이 있는 이들을 영입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바로 저들을 물리고는 사과 인사를 차렸다.

체면을 크게 구겼고, 망신(亡身)을 당했다.


나는 이 뉴스를 듣고는 진승과 오광을 떠올렸다.

먼저 이들의 행적을 살펴본다.


(大紀元) 


고대 중국에서 농민봉기는 많이도 일어났다.

이들은 혁명의 불씨 역할을 하였다.

진나라 말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난을 일으켰다.

물론 한나라 유방(劉邦), 초나라 항우(項羽)도 궐기하였으나,

나는 오늘 진승과 오광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하려 한다.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이유는 따지러들면 여럿이 있겠지만, 

기실 하나로 압축하여 말하여도 그리 틀리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재물이 동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인적, 물적 재부(財富)가 거덜이 났다.

귀족들은 지주계급이라 할 수 있는데, 황제는 이 정점에 서 있다.

이들이 부정부패하고 방탕을 일삼자니,

백성들의 재부를 훑어내고 쥐어짜지 않을 수 없었다.

요역부세(徭役賦稅)

즉 재부를 강탈하기 위해 부역과 세금으로 쥐어짜는데,

이 때 동원되는 게, 가혹한 형벌이다.

그러함이니 앞에서 내가 인적, 물적 재부가 거덜이 났다고 했던 것이다.


刑者相半於道,而死人日成積於市


“형벌을 받은 사람과 길거리가 반반으로 나뉘었고, 

(거리의 반이 형벌을 받은 이로 꽉 찼다는 뜻.)

죽은 사람들이 저잣거리에 매일 쌓여갔다.”


이게 진나라 2세 즉 호해(胡亥) 정권 당시의 정황이다.


제일 말단에 처해 일방적인 수탈에 무방비 상태에 놓인 농민들,

더 이상 물러나려야 물러날 수 없을 때, 폭발하고 만다.

못 먹고 죽으나, 반역으로 몰려 죽으나 매 한가지가 아닌가 말이다.


농민봉기는 계급투쟁에 다름 아니다.

재부를 몽땅 쓸어가진 제왕과 공족, 대부들,

그리고 수탈을 당하는 농민들 간의 계급 갈등에 다름 아니다.


진승과 오광은 병기(兵器)하나 가진 것이 없는 농민이다.

진승은 고농(雇農), 오광은 빈농(貧農) 출신이라 하니 모두 하천 농민이라 하겠다.

  (※ 雇農 : 타인 농토에 고용된 자로, 노임을 받는다.

     自耕農 : 자기 토지를 갖고 경작하는 농민     

     佃農 : 타인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는 사람. 곧 소작농이 되겠다.)

대나무 막대기 하나 높이 들고 혁명의 불을 놓았다.


게간기의(揭竿起義)


“대나무 높이 들고 의거를 일으키다.”


揭竿은 글자로는 대나무 장대를 들었다는 뜻이지만,

나중엔 전용(轉用)되어 봉기를 일으키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현대에도 대만 정치인들이 곧잘 대나무 깃발을 높이 흔들며 선거운동을 하는데,

이는 바로 이런 취의(取義)가 있는 것이다.

기존 질서는 엉망이니 나를 뽑아 새로운 개혁을 하자는 말이다.


기원전 209년, 진나라 2세 호해가,

회하(淮河) 유역에 있던 농민들 900명을 징발하여,

어양(漁陽, 現北京密雲) 땅을 지키게 하였다.

여기 진승과 오광이 뽑히게 되었다.

오광은 무리의 둔장(屯長)이 되었는데, 때는 7월, 비가 많은 계절이었다.

그들이 기현대택향(蘄縣大澤鄉)에 이르렀을 때,

계절은 장맛비가 연일 쏟아지는 때였다.

이에 저들의 발이 묶였다.

명받은 위수(衛戍)지인 어양까지 기한 내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진나라 법은 엄했다.


失期當斬


“기한을 어기면 참수한다.”


진나라 법은 이러했다.

이제 900명의 수졸(戍卒)은 죽을 위험에 처해졌다.


그들은 두 개의 현을 경유해 압송되었다.

그런데 현위(縣尉)들은 모두 흉포스러웠다.

현위들이 치도곤을 놔서 죽여도 할 말이 없는 형편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먼저 현위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일행을 향해 일장 연설을 했다.


“우리는 지금 큰 비를 만나 기한에 닿지 못하게 되었다.

기한에 대지 못하면 참수를 당한다.

저들이 우리를 죽이든지,

아니면 위수지에 가서 죽던지 양자 간에 하나 당할 판이다.

장부가 죽는다면, 한번 큰일을 벌이고나서라도 죽자.”


그의 말은 다른 이들의 투지를 불러 일으켰다.


斬木為兵,揭竿為旗


“나무를 잘라 병졸로 삼고, 대나무 작대기를 세워 깃발로 삼았다.”


대중들은 진승을 장군으로 세우고,

오광을 도위(都尉)로 삼았다.


伐無道,誅暴秦


“무도함을 거꾸러뜨리고, 폭압의 진나라를 징벌하자.”


이런 구호를 외치며 의군(義軍)을 일으켰다.

중국 역사상 제1차 농민봉기가 폭발한 것이다.


저들은 늦은 밤 사당에 모여 횃불을 높이 들고는 소리 높이 부르짖었다.


大楚興,陳勝王


“대초나라여 흥하라.

진승은 왕이라.”


사기(史記)엔 이 장면이 이리 묘사되어 있다.


公等遇雨,皆已失期,失期當斬。藉弟令毋斬,而戍死者固十六七。且壯士不死即已,死即舉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徒屬皆曰:敬受命。


“공들은 비를 만나, 모두 기한을 어기게 되었다.

기한에 대지 못하면 참형을 당한다.

가령, 참형을 당하지 않는다 하여도, 수자리를 지키다 십 중 육, 칠은 죽는다.

또한 장사가 죽지 않는다면 그렇다 쳐도,

죽는다면 큰 이름을 날려야 한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느냐?”


무리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삼가, 명을 받잡겠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바로 이 말씀 王侯將相寧有種乎!

과시 천지개벽하는 언명(言明)이라 하겠다.


이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와 비견된다 하겠다. 자유, 평등, 우애, 아니면 죽음을(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ou la Mort)

시민 선서에 법이나 국왕이 아닌 자유, 평등, 우애의 가치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민주 시민이란 탈계급적 자유민, 평등인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movie 카사블랑카)


저 진승의 표현은 왕을 아직도 강조하고 있으니, 

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에 의의를 두어야겠다.

하지만 환왕(換王)이 이뤄진다 하여도 오직 한 사람만 왕이 되며,

나머지는 여전히 일(一) 왕 밑의 만(萬) 백성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한계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도 중국 역사에선 민주사회가 정착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군왕만 바뀌었을 뿐, 시민은 자라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왕을 절대 가치로 대하지 않고, 상대 가치로 전환하였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민간 설화에 의하면, 

진승, 오광은 농민들을 통솔하여 의군(義軍)을 일으켰는데,

대택향을 먼저 점령하고서는 의군을 일으켜 기현(蘄縣)을 공격하여 들어갔다.

이어 대여섯 현도 공략하여 쳐들어갔는데, 

가는 곳마다 농민들의 분분히 일어나 호응하였다 한다.


진현에 의군이 당도하였을 때,

이미 전차가 600~700승(乘), 기병은 1,000人, 보병은 수만을 넘었다.

진현은 전략 요충지라, 초나라는 후에 이를 수도로 삼았다.

진승, 오광의 영도 하에 일어난 의군은 진현을 근거지로 나라를 세웠다.

이름하여 장초(張楚)라 하였으며,

진승을 왕으로 세웠다.

이는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혁명 정권이라 하겠다.


진승은 전국 농민 봉기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의군은 세 방향으로 나눠 진나라를 향해 진군하였다.

오광은 가왕(假王)이 되어 서쪽 형양(滎陽)을 쳐갔으며,

무신(武臣)은 북쪽 조나라 땅으로 나아가고,

위나라 사람 주시(周市)는 위지(魏池)를 공격하였다.


오광은 형양을 포위하였지만 오래 공격할 수 없었다.

진승은 다시 주문(周文)을 장군으로 삼아 형양을 돌아, 

관중으로 진공할 것을 명하여, 함곡관을 깨뜨렸다.

이 때 의군은 세가 불어나 이미 10만人이 넘었고,

병차(兵車)는 천이 넘었다.


이 때, 의군 내엔 귀족 세력의 대표인 장이(張耳), 진여(陳余)란 인물이 섞여 들었다.

이들은 의군을 분열시킬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북쪽 조나라를 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진승은 저들의 음모를 알아채지 못하였다.

무신을 장군으로 세우고, 장이, 진여를 좌우 교위(校尉)로 삼아,

병졸 2,000을 주어 황하 북쪽을 건너게 하였다.

장이, 진여는 투항자를 모으고, 진나라 관리의 변법을 중용하였다.

3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주문(周文)군은 쾌속 발진하여 병차 천, 병졸 10만人으로 세가 불었다.

관중의 희지(戲地)로 나아가 근처 함양(咸陽)을 핍박하였다.

진나라 2세 호해는 도성 가까이 의군이 몰아닥치자 크게 놀랐다.

급히 장한(章邯)을 파견하였다.

여산에 있는 진시황의 묘를 정비하고 있는 죄수 10만人을 통솔하여,

의군을 맞아 싸우도록 하였다. 

동시에 변경에 있는 왕리(王離)의 군대 30만人을 돌려 의군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 왕리는 전국시대 4대 명장 중의 하나인 왕전(王翦)의 손자이다.)

주문은 농민군을 영솔하여 비록 용맹하게 싸웠지만,

홀로 적진 깊숙이 들어갔고, 훈련이 부족하고, 작전 경험이 없었다.

진군을 만나 습격을 하였으나 패하여, 함곡관으로 밀려나 압박을 받았다.

조양(曹陽) 땅에 주둔하여 지원군을 기다렸다.


무신은 옛 조나라 한단 땅에 주둔하였는데,

장이, 진여는 그에게 조왕으로 자립할 것을 종용하였다.

진승은 전 국면을 돌아보며 판단하였다.

군을 서쪽으로 통솔하여 주문을 지원토록 하였다.

하지만, 장이, 진여는 주문의 농민군을 구하지 않았다.

외려 할거하여 자립해버렸다.

무신을 옹립하여 조왕으로 세우고, 

진여는 스스로 대장군이, 장이는 우승상이 되었다.


진승의 명령은 모른 척 하였다.

잇달아 육국의 옛 귀족들은 땅을 갈라 차지하고 왕을 칭하였다.

가령 한광(韓廣)은 연왕(燕王)으로, 위구(魏咎)는 위왕(魏王)으로, 

전담은 제왕(齊王)으로 각기 칭왕하였다.


이런 식으로 진승, 오광이 일으킨 의군 안팎으로 적세가 형성되고 있었다.

주문은 군을 거느리고 조양에서 3개월을 버티고 있었다.

여러 차례 패하고서는 승지(澠池)로 후퇴하였다.

저렇듯 의군은 수적 열세에다 후원군도 오지 않아, 손실이 다대하였다.

마침내 주문은 자살한다.

오래지 않아 형양의 오광도 포위 공격을 받았는데,

부장인 전장(田臧)의 음모에 걸려 살해되었다.

오광이 죽고 나서 군심(軍心)은 한참 해이해졌다.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이 군을 이끌고 공격해왔다.

전장(田臧)의 군대는 패하고 피살되었다.

기타 의군은 부지기수로 진나라 군에 의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격파 당하였다.

기원전 209년 12월, 장한이 거느린 군은 진현으로 들이 닥쳤다.

진승은 친히 의군을 통솔하여 저항하였다.

병력은 턱없이 부족하였고, 불행히도 패퇴를 거듭하여 성부(城父) 땅에 이르렀다.

이 때, 그의 차부(車伕)인 장고(莊賈)가 진승을 암살하고서는 진군에 투항하였다.


진승의 부하인 여신(呂臣) 등이 투쟁을 계속하였다.

여신이 지휘하는 부대인 창두군(蒼頭軍)은 반격을 하여,

본거지였던 진현을 수복하였다.

반도였던 장고를 잡아 처단하였다.


의군 일부는 후에 항우(項羽), 유방(劉邦)등과 만나, 함께 진군에 대항하였다.

기원전 206년, 진왕조는 농민군의 강력한 타격에 따라 멸망하였다.


진승, 오광의 영도 하에 진나라 말기에 일어난 의군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중국 역사에 있어 찬란한 일획을 그었다.

농민군은 진왕조를 전복시켰고, 지주 계급에 타격을 주었다.

이들 농민봉기군은 사회 발전의 추동력이 되어, 

중국 고대의 봉건 통치 세력에 농민 항거의, 그 혁명적 길을 열어젖혔다.

농민군이 세운 정권은 과시 미증유의 역사적 기적이다.

후세 농민 봉기의 찬란한 귀감이 되었다.


작금의 한국 사회에 비추어보면,

진승, 오광과 같은 기층민은 보이지 않고,

모두 공족(公族), 대부(大夫)들만 설치고 있다.

올 총선을 노려 신당이 다수 만들어지고,

당수들이 입을 헐어 기염을 토하고 있다.

저들은 모두 국민을 앞세우고 있으나,

내가 보기엔,

王侯將相寧有種乎!

이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마다 대권의 주인공이 되려는 욕심만 그득하지,

헬조선에 빠져 허우적 되는 불쌍한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양 싶다.

그 극명한 사례를 나는 어제의 안철수 신당의 영입 번복(翻覆)에서 확인한다.

오늘은 구당(舊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다.

오늘날 국민들은 개혁을 목 타게 원하고 있지만,

이를 자임하는 당들은 신구를 가리지 않고,

왕후장상이 되려고만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혁명의 두 기둥 진승(陳勝)은 차부(車伕)인 장고(莊賈)에게 암살당하고,

오광(吳廣)은 부장인 전장(田臧)의 음모에 걸려 살해되었다.

이 모두는 백성을 위하지 않고,

제가 왕이 되고, 고관이 되려하였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ou la Mort


이 목 타는 시민들의 부르짖음을 기억하라.


***


이 글은 다음 글을 그 짝으로 삼겠다.


☞ 2014/01/25 - [소요유] - 야반출도(夜半出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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