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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焚書坑儒)

소요유 : 2016. 1. 14. 17:00


분서갱유(焚書坑儒)


중국사상사엔 끔찍하다 할 대겁난(大劫難)이 수 차 일어났다.

그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는 진나라의 분서갱유를 오늘의 세태와 비교하고자 한다.

먼저 그 대략의 사건 경과를 따라가 본다.


(老連環 畫, http://guoqing.china.com.cn/2015-07/23/content_36128034.htm)


분서갱유는 진시황(秦始皇)이 육국(六國)을 통일한 후,

통치 사상의 구체적 실천 행위의 일환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두고 흔히들 진시황이 잔악하다는 인상을 갖는데 그치는데,

그게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이 글을 통해 그 내막을 바로 알게 되길 바란다.


그 안짝에 내재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 인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그 동기와 과정에 대한 이해(理解)나 시비(是非) 판단(判斷)을 옳게 할 수 있다.

나아가 미래의 교훈을 함께 얻게 된다.


통일 전 전국시대(戰國時代)엔 제후가 봉지에서 각기 할거하였고,

나라마다 사회, 경제, 문화, 사상이 달라 혼란스러웠다.


허신(許慎)의 설문해자서(說文解字序)를 보면,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分為七國,田疇異畝,車涂異軌,律令異法,衣冠異制,言語異聲,文字異形。


“일곱 나라로 나뉘어, 밭의 면적 단위가 달랐고, 수레의 바퀴 폭이 달랐으며,

율령이 달랐으며, 의관의 제도가 달랐으며, 말(언어)의 소리가 달랐으며,

문자의 형태가 달랐다.”


진나라는 통일을 한 후, 

정치적인 여러 개혁 조치를 취하고,

경제상의 통일을 공고히 하였다.

정치나 경제상의 통일뿐이 아니라,

뿌리 깊게 내린 봉건전제제국(封建專制帝國)을 해체하려면 먼저 사상의 통일이 필요했다.

그 조치의 하나로 봉건전제 제도 대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했다.

기실 이로부터 중국 역사상 가장 중대한 재난이 일어나게 된다.


전국시대 제후끼리 분쟁을 일삼을 때는 물론 경제상으로 큰 폐해가 생겼다.

하지만 사상 문화적으로는 일찍이 없었던 큰 발전이 있었다.

각종 사상 유파, 학술 단위가 일어나, 활발하게 세상을 휩쓸고 다녔다.


가령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음양가(陰陽家), 종횡가(縱橫家), 농가(農家), 잡가(雜家), 소설가(小說家)라 불리는 소위 구류십가(九流十家)가 그것이다.

(※ 九流十家 : 소설가는 流에 산입되지 않는다.

   구류십가는 소설가 대신 병가(兵家)를 넣기도 하는 등,

   거론하는 이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三教九流라 일컫는 경우와 九流十家의 九流는 같지 않다.)


각파들은 제 각각 자기주장을 폈으며, 상대를 힐난하고 비판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백가쟁명(百家爭鳴)으로 학술 사상적으로 크게 꽃을 피웠다.

고대 중국 사상사적으로 과시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다만, 봉건국가를 통일한 후,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해가는 과정 상,

진시황은 경제적으로 전제권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문화 사상적으로도 잔혹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황 26년(기원전 221년) 통일 정권이 섰을 때부터,

시황 34년(기원전 213년)까지 8년 간 분서(焚書)를 실시했다.

일찍이 이미 6국의 궁정과 민간에 퍼져 있는 고전 문헌을 대량으로 수집하였다.

동시에 70여 노학자를 초빙하였고, 이들에게 박사란 관직을 주었다.

또한 2,000여 학생을 소집하여 박사 밑에 두었다.

이들을 제생(諸生)으로 부르도록 명했다.


그 목적은 이들을 이용하여 고전문화를 깨끗이 정리하고 선별하는데 있었다.

정부의 위력으로써 봉건전제 정권에 유리한 책을 금지하고,

진나라 정권에 유리한 서적을 장려하려 함이다.


이게 고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근대나 오늘날도 대개 독재, 전제 국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목격되는 나라는 민주화가 아직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판단할 수 있다.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하의 글을 대하길 바란다.


진시황은 스스로 이리 말했다.


吾前收天下書,不中用者盡去之,悉召文學方術士甚衆,欲以興太平。


“내 앞에 천하의 책을 모아,

적절치 못한 것은 없애고,

허다한 문학, 방술사(方術士)를 모두 소환하여,

천하를 태평케 하고자 하노라.”


이리하여, 진나라 정권은 70 박사를 예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생들도 후하게 대우하였다.


다만, 그 실시 과정상 진시황의 본래 의도를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박사나 제생이란 본디 구시대의 학자인지라,

머릿속엔 구문화와 복고사상에 젖어 있었다.

저들은 주례(周禮)를 향한 복고사상과 유가의 사상을 좋아하였다.

소위, 전제 정치 사상에 대하여 협조를 하지 않고,

진시황의 전횡을 반대하는 언동을 삼가지 않았다.

하지만 진시황은 유가를 멸시하고 법가를 추장(推獎)하였다.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의 주장을 십분 숭앙하였다.


明主之國,無書簡之文,以法為教;無先王之語,以吏為師。


“현명한 군주의 나라는 책에 의지하지 않고 법에 의해 교화한다.

선왕의 말이 아니라, 관리의 지침을 스승으로 삼는다.”


(※ 자료 참고 : 中國 網際網路)


원래 법가는 말만 번지르하고 실질이 없는 학자들( 주로 여기선 유가가 되겠다만), 

그리고 의리가 있다는 협객들이 설치고 다니면서 대접을 받는 것을,

난 즉 나라가 어지럽혀지는 근원으로 보았다.

의리라 하지만 저것 따지고 보면 저희들 패거리끼리만 지켜지는 것이지,

대의에 반하는 것이 일상이다.

오늘날은 아니 그러한가?

제 영혼을 팔아재끼는 어용학자들은 당대에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용팔이 사건처럼 주먹들이 정치 세력들에게 고용되어 난을 일으킨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차제에 여기 이에 대한 법가의 유명한 말씀을 다시금 꺼내 상기해보도록 한다.


儒以文亂法,俠以武犯禁,而人主兼禮之,此所以亂也。夫離法者罪,而諸先生以文學取;犯禁者誅,而群俠以私劍養。故法之所非,君之所取;吏之所誅,上之所養也。法趣上下四相反也,而無所定,雖有十黃帝不能治也。(韓非子)


“유가는 문(文)으로써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武)로써 금령을 어긴다.

하지만 군주가 아우르며 그들을 예로 대하니, 이것이 난의 요인이 된다.

무릇 법에 걸린 자는 죄를 짓는 것이 되지만,

학자들은 학문으로써 채용이 된다.

금령을 어긴 자는 주벌을 받지만,

협객들은 사사로운 검술로써 길러진다.

그런즉 법으로 아니 되는 것을, 군주가 채용하고,

관리가 주벌을 내리는 짓을, 위에서 기르는 바가 된다.

법과 취향, 위와, 아래, 4 가지가 서로 상반되어 일정한 것이 없으면,

비록 열 명의 황제(黃帝)가 있어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이게 부국강병의 요체이며, 삼황오제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묘책이다.

박사나 제생은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시황 34년(기원전 213년) 함양(咸陽)에서 개최된 1차 연회석상에서,

박사인 순어월(淳於越, 淳于越이라고도 함)은 군현제를 폐지할 것을 제안하였다.

대신 다시 분봉(分封)제로 되돌아 갈 것을 청하였다.


事不師古而能長久者,非所聞也。


“옛 것을 스승으로 섬기지 않고도, 오래 간다는 소리를 나는 듣질 못했다.”


순어월이 이 말을 단초로 하여 분서(焚書)가 일어나니,

기실 이미 당시엔 유가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법가를 중심으로 한 세력 간에,

암투가 자심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태 전 임건순氏는 진묵(秦墨)에 대하여 잘 정리를 한 훌륭한 책을 내었다.

유덕화가 주연으로 나오는 흑공(墨攻)이란 영화는 진묵에 대한 고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진묵이란 진나라로 들어가 활동한 묵가(墨家) 무리를 뜻한다.

그는 이들 진묵이 진나라의 법을 정비하는 행정 관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주의에 철저한 진에서 진묵들의 활동은 지극히 제한적이었거나,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스러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학설도 있다.

어쨌건 진 통일이후엔 유가도 묵가도 크게 타격을 받았다.

한나라 이후 무제가 오경박사 제도를 둔 때문에,

유교는 거의 국교가 되다시피 하여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묵자는 한나라 이후에도 살아나지 못하고 절학(絶學)이 되었다.

이는 묵가의 겸애(兼愛) 사상은 제왕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할 수 없어,

본디부터 동시 존립이 어려운 사정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생각된다.

본질적으로 제왕의 이해와 백성의 이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천하의 재부 모두가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황제와 백성의 이해가 어찌 같으랴?

그러함인데 만민이 서로 사랑하며, 재물을 함께 나누자는 묵가를 어찌 용납하리.


據財不能以分人者,不足與友。(墨子)


“재부(財富)를 사람과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벗을 사귈 수도 없다.”


영국 왕실의 재산은 약 10억 달러(2013년 기준)라 한다.

게다가 연간 600여억 원 달하는 왕실 유지비용을 국가 세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 정도면 기 천명이 살아갈 수준이다.

소수의 순혈 피를 위해 국민의 재부가 쓰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왕실 존폐 논란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지만,

영국 국민 대부분은 왕실 존립을 원하다고 한다.

국민 통합과 정체성 유지 운운하고 지지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 미망(迷妄)인 게라.


거석문화(巨石文化)란 큰 것, 거대한 권력에 복속하는 인류의 비루(鄙陋)한 현상에 불과하다.

거석 때문에 수많은 양민이 피와 땀과 생명을 헛되이 빼앗겼지만,

사람들은 거기 의미를 부여하고, 매달리고, 무릎을 꿇곤 한다.

절대 권력자는 이에 기생하여, 재부를 독식하고, 권세를 누린다.

이를 어찌 미망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음인가?


부자 감세를 하여도, 가난한 이가 편을 들고,

위안부 문제를 굴욕적으로 처리하여도, 잘했다고 박수를 치는 이들이 있다.

상징과 위력 앞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는 몽매한 이들.

과시 가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 돌아와 서자. 

순어월의 제안이 있자, 

시황제는 이를 군신들이 의론에 붙일 것을 명하였다.

승상 이사(李斯)는 그 설에 오류가 있고, 그 말이 한참 모자람을 들어,

황제께 상서를 올린다.


過去天下散亂,沒有能統一之者,所以諸侯並起,「語皆道古而害今,飾虛言以亂實,人善其所私

學,以非上所建立。今陛下並有天下,別黑白而定一尊;而私學乃相與非法教之制。聞令下,即各以其私學議之,入則心非,出則巷議,非主以為名,異趣以為高,率群下以造謗。


“과거 천하가 어지러웠을 때, 이를 능히 통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위 제후가 여기저기 일어났지만,

말하는 즉 모두 옛 것을 도(道)라 하고, 지금 것을 해악이라 하였습니다.

공허한 말로 꾸며 실제를 어지럽혔으며,

사람들은 사사로이 제 학문을 좋아하였고, 최상의 것을 바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아우르시고, 

흑백을 가려 하나의 존귀함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학문은 서로 불법 제도를 펴고 있습니다.

듣건대, 저들은 각기 의론을 거두지 않고,

입조하여서는 다른 마음을 품고,

퇴조하여서는 골목에서 수근거린다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이름을 삼고,

별난 취향을 높이고,

무리를 거느리고 비방을 일삼습니다.


이를 금하지 않는다면 주군의 권세가 아랫사람에게 항복하는 격이며,

아래로 당파 무리를 지어 편안치 않을 것입니다.”


이사가 이리 이해로써 분석하여 아뢰,

진시황으로 하여금 크게 옳다 이르게 하였다.

하여, 이사가 제출한 분서 건의를 시황은 윤허하였다.

즉 진나라의 역사서적 이외에, 

기타 사서와 시, 서, 백가의 소론 전부를 소각할 것을 건의하였던 게다.

단, 박사가 관장하는 도서와 농서(農書), 의서(醫書) 그리고 점서(占書)는 제외하였다.

각지에 있는 일체의 장서 전부를 관부에 넘겨 소각토록 하였다.


명령 하달 후, 30일 내에 소각하지 않는 자는 노역에 처하게 하였다.

또한 하령이후 감히 시와 서에 대하여 의론을 펴는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옛 일을 들어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일족을 죽이도록 하였다.

관리로서 이를 알고서도 적발하지 않는 자도 같은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사의 건의에 따라,

진제국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은,

도처에 책을 태우는 불이 타올랐다.

30일이 되지 않아서, 

진나라 이전의 고전문헌은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이는 중국 고대 사상사에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이게 그 유명한 분서 사건의 전말이다.


진시황의 어리석은 분서 조치 후 1년 남짓도 되지 않아, 

소위 갱유(坑儒)라는 참혹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진시황은 책이 비록 태워졌지만, 사람이 가진 사상은 태울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정권 기관 중에서,

일부 복고사상을 가진 구(舊) 귀족들이 장악한 저작 문화사업,

거기 종사한 사람들도 역시 깨끗이 청소해버리는 것도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단, 이를 해치우기 위해선 무엇을 핑계, 구실로 삼아야 하나?


진시황은 다중 성격의 인물이다. 

즉 갑옷을 걸치고 전쟁에 나가서는, 천군만마를 통솔하여,

육국을 집어 삼킬 정도로 용감무쌍하였다.

반면 미신, 신선 사상에 빠져,

오래 살기를 탐할 때는, 

겁약한 심리 상태에 놓이곤 하였다.

그는 중국을 통일하여 역사상 제일 높은 황제의 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신선 방술에 미혹되기도 하였다.

방사(方士)를 중용하여, 연단술로 만든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였다.

거액의 재물을 쓰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을 파견하여 원해심산(遠海深山)에서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약을 찾게 하였다.

진시황 35년(기원전 212년) 후생(侯生)과 노생(盧生) 두 사람에게 이 약을 구하게 하였다.


이들은 이런 선약(仙藥)은 근본적으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옳지 않다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고 부귀를 사취하였다.

시간이 오래 지나자 속임수가 종국에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여 서로 모의를 하였다.


‘진시황은 사람됨이 천성적으로 괴팍하여 자기 멋대로이다.

제후로 일어나 천하를 다 아울렀다.

욕심대로 마음껏 행동하는 데는 자고이래로 당할 자가 없다.

옥리는 (아껴) 전임케 하고, 총애하였다.

하지만, 박사가 70인이지만, 특별히 중용하지는 않았다.

재상이나 대부 모두 해야 할 일을 부여받지만, 처리는 웃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형벌과 죽임을 즐겨 그것으로 위엄으로 삼았기에,

천하는 죄를 두려워하며 벼슬자리를 지냈다.

감히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 모든 일은 대소를 불문 웃전에서 결재했다.

권세를 탐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 장생불사약은 얻지 못하였다.

그러하니 도망쳐 버리자.’


이 소식을 듣자 진시황은 크게 노하였다.

방사에게 질책하여 말하다.


‘한중(韓眾) 등이 가서는 보고 하나 없다.

서시(徐巿)는 거만금을 썼지만 종내는 약을 구하지 못했다.

다만, 간사한 이를 노려 서로 고발하는 일만 나날이 들린다.

노생(盧生) 같은 무리는 내가 특별히 두터이 대우해주었는데,

이제는 나를 비방하고 있다.

이는 내가 덕이 없는 탓이구나.

함양에 있는 제생(諸生)들은 내가 조사토록 해보니,

요사스런 말로 백성들을 혼란케 한다는구나.

이에 어사로 하여금 제생들을 조사토록 하였다.

제생은 서로를 고발하였는데,

자기는 제외하고 범법자들이라 이르는 숫자가 460여인에 이른다.

이들 모두를 함양 땅에 묻어 버려라.“


이를 천하에 고지하도록 하였다.

후일을 경계하기 위해 이리 징벌을 하였다.

이게 소위 역사에서 말하는 갱유(坑儒) 사건의 전말이다.

갱유 사건은 다만 1차에 끝나지 않았다.

차후 또 연이어 일어나는데 2차, 3차 때는 그냥 도살(屠殺)해버렸다.


문헌통고.학교고(文獻通考﹒學校考)를 보면, 이리 기술하고 있다.


始皇 又令冬種瓜麗山,實生,命博士諸生就視,為伏機,殺七百餘人。秦二世時,又以陳勝起,召博士計生議,坐以非所宜言者,各數十人。然此秦之於博士弟子,非惟不能考察試用之,惟恐其不澌盡泯沒矣。


“진시황은 또한 여산에 겨울 외(박)를 심도록 명령하였으며,

박사, 제생들로 하여금 이를 보도록 하였다.

이 때, 암기로 쏴 죽였으니 그 수가 700여 인이다.

진나라 2세 때는 진승, 오광이 난을 일으켰다.

이 때 박사 계생의(計生議)를 소환하였다.

자리에 앉혔으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가 수 십인이었다.

이리 진나라 박사와 그 제자들은 시험 삼아 쓰려 하여도 제대로 알 수 없을 뿐더러,

사라져 없어버릴까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산의 골짜기 따뜻한 곳에 겨울 외를 심도록 하고서는,

다 자라자 박사, 제생에게 즐기도록 초빙을 하였단 것이다.

그리고는 복기(伏機)를 쳐다볼 것을 명했다.

복기란 중국 무술 같은데 보면 동굴에 장치한 암기(暗機), 즉 비밀 기관 장치를 말한다.

사람들이 어찌할까나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암기를 발사하였고, 이 때 위로부터 흙이 쏟아져 내려 모두 압살되었고,

종내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야만적인 폭력으로 분서, 갱유를 저질렀으나,

이로써 사상의 통일을 가져오길 꾀했다.

아울러 황제의 절대 권력을 과시했다.

분서는 춘추전국시대 이래 꽃피워왔던 사상에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중국 문화의 보고에 큰 재앙이라 하겠다.

갱유는 유가(儒家)나 지식인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반면 법가(法家)는 완전히 관학화(官學化) 되었다.

이로써 진나라는 법가만이 홀로 남아 엄혹한 통치가 지속되었다.


***


분서, 갱유는 잔혹한 사건임엔 틀림없지만,

진시황이 그저 단순히 잔혹하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로선 천하문물을 하나의 기준 하에 정비하고,  

세계를 통합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도량형을 통일하고, 문자를 정비한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문물, 규격의 표준화(standardization)라 하겠다.

나라마다 다르다면 온 백성을 하나로 규율하는데도 불편하고,

효율적으로 통치 이념을 펴기 어렵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 않고,

사상의 통일까지 꾀하려 하다 참혹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눅5:37-38)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지 않고 헌 부대에 넣으면,

누룩이 익을 때 가스가 나와 팽창하기 때문에 터져 버릴 우려가 있다.

그런즉 새 술은 새 부대에 넣는 것이 상식이다.


순어월이 주장한 복고주의는 시황에겐 기실 턱도 없는 말이다.

선왕의 덕을 이야기하고, 주례를 찾아 복원하자고 주장하는 유가들은,

통일 직후의 창신(昌新)한 기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가령 문물의 제도, 규격 등의 통일은,

낭비를 없애고, 백성의 삶을 편리하게, 

그리고 사회를 효율적으로 작동케 하고, 

미래 발전의 기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상의 획일적 통일은 관변 일변도로 나아가,

경직된 문화 풍토를 만들어내고,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저해한다.

게다가 생각이 다른 사상을 억제하고, 멸절시키려 할 때,

강제력에 의해 일시 표면적인 통합은 이룰지 모른다.

하지만, 복심(腹心)으론 다른 생각을 품고, 불평불만을 키워가기 때문에,

진정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기 어렵다.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면,

이종 사상과 교류, 경합을 통해 보다 섬세하고, 깊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 주도의 국정화 국사 교과서 논란도,

이런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비공개 제작은 여러 인사들이 제기하고 있는 친일이나 독재 미화 시비에,

스스로를 방어할 정당 근거를 절로 상실하고 있다.


국정화 역사 교과서는 여타의 기존 역사서에 대한 현대판 분서(焚書)와 비견된다 하겠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국가 권력이 자의로 제한하고,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오늘날과 같은 민주 시민의 원리에도 더욱 위배된다.


子墨子言曰:「古者民始生,未有刑政之時,蓋其語『人異義』。是以一人則一義,二人則二義,十人則十義,其人茲眾,其所謂義者亦茲眾。是以人是其義,以非人之義,故文相非也。是以內者父子兄弟作怨惡,離散不能相和合。天下之百姓,皆以水火毒藥相虧害,至有餘力不能以相勞,腐臭(列)餘財不以相分,隱匿良道不以相教,天下之亂,若禽獸然。

(墨子 尚同上)


“묵자는 말한다.

옛날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생겨나, 아직 형법, 정치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말로써, 의사를 달리 표출하였다.

사람 하나가 있으면 의견 하나가 있고,

사람 둘이 있으면 의견 둘이 있고,

사람 열이 있으면 의견 열이 있었다.

사람이 많아지면, 역시나 그 의견도 많아졌다.

이로 인해 사람이 자신의 의견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은 그르다 하였으니,

이리 서로들 비난하기 바빴다.

그래서 가정 내에서는,

부자 형제간에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며 흩어지며, 서로 화합하지 못했다.

천하의 백성은 모두 물, 불, 독약으로 서로를 해쳤다.

남는 힘이 있어도 서로 돕지를 않았으며,

돈이 썩어 나고, 재물이 넘쳐나도 서로 나누지 않았으며, 

좋은 도가 있어도 감추고 서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 당시의 천하의 혼란은 마치 금수와 같았다.”


나는 지금 묵자의 말씀을 꺼내든다.

이 글을 보면 다양한 의견들끼리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니,

무엇인가 하나로 통일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맨 앞에 당시엔 형정(刑政)이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형정이란 곧 형벌제도, 정치를 가리킨다.

통치 권력이 나타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통제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연한 물음이 제기된다.

一人則一義 多人則多義

과연, 이것은 마땅한 것이 아닌가?

여기 義는 글뜻 만으로는 의로움이지만 개인 하나 하나에 매몰되면,

자신의 의견, 주장, 사익(私益)에 불과하다.

묵자는 이것을 통치 권력이 나타나 다툼과 혼란을 막아내자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겸애(兼愛)로 모아지길 바란다.

게다가 통치란 절대 군주 개인의 임의로운 권력을 내용으로 하여서는 아니 되고,

하늘의 뜻을 대리하여 지상에 구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天之行廣而無私,其施厚而不德,其明久而不衰,故聖王法之。(墨子 法儀)


“하늘의 운행은 광대하면서도 사사로움이 없다.

그 베품은 두터우되, 공덕이 없다.(공덕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 밝음은 오래 가며 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왕이 이를 법도로 삼았다.”


유가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말하고, 선왕의 덕을 끊임없이 말한다.

저들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법가도 마찬가지지만, 묵가 역시 사람을 믿음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때문에 묵자는 하늘(의 뜻)에 의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실 정치의 권력자를 신뢰하지는 않고, 

다만 왕이 이를 대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에 서서, 역사를 되돌아보면, 

권력자 역시 一人則一義를 벗어난 적이 없다.

여기 義는 곧 利임이라, 묵자나 한비자가 보듯,

사람은 본질적으로 신뢰의 대상이 아니 된다.


나 역시 그러므로 생각한다.

一人則一義의 義든 利든 이를 인정한 후에라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

현대의 민주 시민의 원리라는 것도,

결국은 一人則一義를 배타적 천부 권리로 인정하는 것을 기초로 성립한다.

묵자는 그것을 겸애(兼愛)란 극단적인 공리주의적인 지향으로 합의를 모아가지만,

현대 민주 사회 정신은 사적(私的) 자치(自治)를 보장하되,

공공의 이해를 해치지 않는 조건 밑으로 최소 제한함으로써 규율하고자 한다.


미국 수정 헌법 성립사를 보면 이를 극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영국, 유럽으로부터 저들이 도망치듯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을 때,

국가나 개인 절대 권력자들로부터의 폭압을 배제하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나는 여기서 두 조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정 헌법 제2조 : 국민 무장 권한

수정 헌법 제8조 : 잔인하고, 이상한 형벌의 금지 등


수정 헌법 제2조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수정 헌법 제8조

과다한 보석금을 요구하거나, 과다한 벌금을 과하거나,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과하지 못한다.

Excessive bail shall not be required, nor excessive fines imposed, nor cruel and unusual punishments inflicted. 


저들은 인간 불신을 전제로 국가를 건설하였다.

오늘날 총기 사고 때문에 개인 무장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원래 개인이 총을 보지(保持)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남을 신뢰의 대상으로 보지 않겠단 말이다.

개인의 침해를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존치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여기에 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늘 지나는 거리 모퉁이에 이동통신 대리점이 하나 들어서 있다.

점포 전면에 내달은 각종 현란한 선전물들은 수시로 바뀐다.

하지만 내용은 하나 같이 동일하다.


‘국내 최저가’,

‘무제한 동영상 시청’

‘무제한 통화’


이것을 믿고, 찾아가 대하다 보면,

반드시 숨겨진 조건 하나, 둘, 셋이 따라 나온다.

무엇을 해야, 그 선전물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니깐 저 선전물은 열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론 칠, 팔을 그 실질 내용으로 한다.

이를 만족 못할 시,

소비자는 권유하는 이를 쫓아가다 종국엔 열을 채워 사게 되며,

욕심이 동하면 급기야는 열 셋, 스물을 탐하게 된다.

물론 이에 따라 가외의 돈을 더 지불하여야 한다.


믿음이 사라진 거리.

거기 현란한 선동과 과장, 그리고 욕망의 깃발이 나부낀다.

하니 유가 식의 인치(人治)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군자로 채워지지 않은 한,

성공을 담보하기 어렵다.

한비자는 따라서 인치를 부정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하고,

묵자는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順天意)고 외친다.


順天意者,義政也。反天意者,力政也。(墨子 天志上)


“하늘의 뜻에 순응하면, 의로운 정치라 하고,

하늘의 뜻에 반하는 것을 힘의 정치라 한다.”


그러함인데, 이러하던 묵자들은 어이 하여 진나라로 들어갔는가?

공격을 당하는 나라가 있으면 묵가는 찾아가 적의 공성(攻城)을 막아주었다.

그야말로 정강이 털이 없어질 정도로 천하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구하려 하였는데,

패권 국가에 자진하여 들어갔는가? 


墨子稱道曰:「昔者禹之湮洪水,決江河而通四夷九州也,名山三百,支川三千,小者無數。禹親自操稿耜而九雜天下之川,腓無胈,脛無毛,沐甚雨,櫛疾風,置萬國。禹,大聖也,而形勞天下也如此。」使後世之墨者多以裘褐為衣,以跂蹻為服,日夜不休,以自苦為極,曰:「不能如此,非禹之道也,不足謂墨。(莊子)


“묵자는 도에 대해 이리 말했다.

‘옛날 우임금은 홍수를 막고, 장강과 황하의 물을 트고, 

사방 오랑캐 땅과 온 나라를 통하게 했다. 

그 때 다스린 명산이 삼백 개였고, 지류는 삼천 갈래였으니, 그밖에 작은 것들은 무수하다.

우임금은 친히 삼태기와 가래를 들고 천하의 강물을 규합하여 바다로 흐르게 했다. 

(九 : 讀糾。糾合錯雜,使川流貫穿注海也。九與鳩糾勼𠀤通。)

그 때문에 장딴지에는 살이 없었고, 정강이에는 털이 없었다. 

소나기에 목욕을 하고 거센 바람으로 머리를 빗으면서, 모든 나라들을 안정시켰다. 

우임금은 위대한 성인이었는데도, 천하를 위해 이처럼 몸을 고단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후세의 묵가들에게 털가죽 옷과 칡베 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자신을 고생시키는 것을 최고의 법도로 삼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임금의 도가 아니니,

묵가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을 구하는데 조금씩 지쳐 간 것이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패권 지향 국가에 의지하여 천하 통일을 하고,

이로써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한다?

그러기엔 진나라는 너무 토양이 척박하다.

겸애란 분배가 정의롭게 이뤄져야 지상에 그 이상이 실현된다.

헌데 진나라는 약소국을 집어 삼키려고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패권 강국이다.

그러한 곳에 들어가 협력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엔 묵가 무리에 대한 기술이 적지 않다.

진시황의 실부(實父)라 일컬어지는 여불위(呂不韋)가,

천하의 인재를 모아 집대성한 책이 여씨춘추이다.

이리 볼 때, 진나라에 묵가 무리들이 활약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군사, 토목 기술의 전문가 집단인 묵가가 통일 전엔 진에서 그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일이 되고 나선 그들의 역할은 급격히 축소되고,

외려 국시(國是)와 사상적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법가를 제외한 유가나 묵가는 분서갱유 이후 거의 멸절 상태가 되고 만다.

다행이 유가는 한나라이후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지만,

묵가는 그냥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는 묵자를 대하면 예수가 절로 생각킨다.

갖은 핍박을 받으며, 제 이상과 믿음을 세상에 펴나가는 캐릭터가 너무도 유사하다.

묵자가 一人則一義 운운한 것은,

개개인의 사상을 억압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여기 一義는 一利 즉 사사로운 이익을 뜻한다.

대의(大義)를 저버리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박질에,

여념이 없는 세상, 곧 전국시대 제국(諸國)의 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의 이상적인 성왕의 법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이런 말씀을 하고 있음이다.

天之行廣而無私,其施厚而不德,其明久而不衰,故聖王法之。

여기 보면 천지의 운행엔 사사로움이 없다 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란,

성왕(聖王)의 법도를 따르자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말대로 하자면 곧 좌편향된 것을 바로 펴자는 것이라 하고 있다.

하지만 앞전의 교학사 교과서 파동의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하나, 둘 빼고는 그 누구도 그 교과서를 채용한 학교가 없었다.

이제 이러한 것을 국가가 만들어 一人則一利하자는 것이다.


이게 진나라의 분서갱유와 무엇이 다른가?

국정 교과서가 만들어지면,

지금 유통되고 있는 제자백가에 당(當)하는 다양한 교과서는 땅구덩이에 묻히고 만다.

그러하니 이를 두고 분서갱유라 이르는 것을 어찌 지나치다 하겠음인가?


통일제국 진나라는 존속 기간이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 고작 14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리 짧은 시간에 망한 이유가 여럿이겠지만 대체로 학자들 간에 일치된 견해는

백성들에게 가해진 엄중노역(嚴重勞役)이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苛政猛于虎

‘학정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이는 민중봉기의 가능성을 당연히 배태(胚胎)한다.

진 2세 호해(趙高) 때는 황제가 무능하였고, 

조고(趙高)란 간신이 전권을 장악하여, 더욱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에 민중 변란이 폭발하였다.

당연 이미 망한 육국의 복국(復國) 운동이 일어났고,

항우, 유방, 진승, 오광 등 천하 영웅호걸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나라의 통일에 따른 고대 중국의 변화는 다대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군현제(郡縣制)를 기초로 한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가 확립되었다.

제후들과 나눠 갖던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어 생살여탈권을 혼자 갖게 되었다.

사회, 문화적으로는 문자통일, 차동궤(車同軌) 통일화폐, 도량형(度量衡) 정비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일궈내었다.

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제자백가 말살 정책을 펴고,

민중은 무술(巫術), 점복(占卜) 등 미신에 빠져 들고,

황제는 불로초, 단약 등에 미쳐 천금을 뿌렸다.


백성은 가혹한 학정에 시달리고,

사상적으로는 다른 것은 용납하지 못하고 모두 말살하고 말았다.

오늘날 이 땅엔 비정규직이란 멍에를 쓰고 신음하는 노동자가 근 반이다.

젊은이들은 취직이 되지 않아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며 자조(自嘲)를 일삼고 있다.

그러함인데도 기간제법이니 파견법이니 하는 노동법 개정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게 과연 비정규직을 줄이고, 처우를 개선하는 일인가는,

조금만 공부를 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자기와는 무관 일이라 지나칠 일이 아니다.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국정 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이 일은 확정이 되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분서갱유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난 一人則一利는 배격하지만,  

一人則一義, 多人則多義를 한껏 지지한다.

만인이 모두 저마다 양심껏, 제 의사껏 사유를 하고, 사상을 키우는 세상을 꿈꾼다.

다만 대의(大義)를 저버리고 소리(小利)에 집착한다면 당연히 배격하여야 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내가 늘 이야기 하듯,

최소한의 이런 시민 의식만 가져도,

세상은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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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6. 1. 14. 17: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