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인정투쟁 별고(別考)

소요유 : 2018. 9. 12. 18:23


나는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서 시민기자로 활동하는 이들 중,

특별히 둘을 기억한다.


내가 수많은 이곳 기자들 가운데 진국이라 칭하는 이들.

그 중 하나에 대한 기억이 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당시, 그는 치매 엄마를 모시고 시골에서 지내면서,

담담하니 글을 써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절필한다고 선언했다.


글 쓰는 것을 기화로, TV에도 출연했고, 책도 내었다.

그런 그의 변인즉,

여기 삿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리라.

TV 출연을 하여, 실제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연출하기도 하였을 터이며,

글이라는 것이 매양 진실만을 담보하지도 않았음을 알아차리자,

붓을 꺾겠다는 이야기렷다.


아, 역시 진국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리 충실하구나.

그리 그렇게 여겨졌다.


어찌 하다 그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가 내게 책을 하나 보내주겠다고 한다.

내가 한참 유기농에 대하여 공부하던 차, 그와 인연이 닿았던 것인데,

그가 내게 우정 책을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이게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개설한 카페에 가입하고, 

책을 돌려 읽기 프로그램에 응하여,

다 읽고는 다른 이에게 이어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뭇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 내게 그 사정을 밝힌 것도 아니라, 적이 배신감이 밀려왔다.

나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였지 않은가?

거죽으로 뱉어낸 말의 진실은 소실되고,

저이의 내심에 이끌려 동원된 것이다.

여기 응할 수는 없었다.

하여 다음부터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란 이리 믿음의 존재가 아니구나 싶었다.

이내, 내 감식안(鑑識眼)이 미치지 못하였단 자괴감이 컸다.

지인지감(知人之鑑)

이것 나는 아직 한참 모자르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발심(發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실 내가 잡학이라 멀리하였던 상학(相學)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리 믿음을 배반당하자, 

근원적으로 나, 그리고 나아가 사람 일반의 인식 체계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 본초적 고대의 학문인 관상에 대하여 급히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내가 가끔 들리는 블로그 하나,

거기 글 주인이 블로그를 폐쇄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다 갑자기 공지 글 하나를 남겨 두고 모두 지워버렸다.


기실, 그는 얼마 전에도 이런 운을 떼기는 하였다.

장차 다른 길을 가겠다는 말이다.


그러자, 나는 절필을 선언하였던 오마이뉴스의 진국 기자,

그를 다시 상기하였다.

나의 믿음에 적지 아니 상처를 남기고, 절필하겠다고 선언한 그.

그는 그 후 어찌 되었는가?

어디 짐작하여 보라.

나는 겪은 바가 있는 고로,

그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고 말리라, 이리 보았다.


잊혀진 그, 아니, 이미 내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

오늘 글을 쓰기 위해 확인해 보니,

그는 여전히 오마이뉴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를 확인하면서,

오늘 이야기의 본론을 시작한다.


어떤 이가 하나 있다.

또 다른 블로그 주인 하나.

이 사람이 얼마 전부터 블로그 운영하지 않고 접으리란 내심을 비췄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글이 올라왔다.

그런데 며칠 전, 과연 그의 블로그엔 폐쇄 공지가 하나 올라오고,

멀리 떠난다는 글이 하나 올라와 있다.

다른 글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 그가 드디어 그리하였는가?

그런데, 바로 뒤미처, 오마뉴스 그가 생각이 났다.

절필 하겠다면서 사라졌던 그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블로그 주인도 마음이 여리고 굳은 것을 떠나,

심지가 썩 굳은 이는 아니라 생각하였다.

그런즉, 이 사람도 역시 필경 조만간 다시 나타나고 말리라.

나는 이리 짐작을 하였다.


왜 아니 그럴까?

며칠 만에 다시 들어가 보니,

지운 글이 다시 살아나고,

이웃들의 걱정에 치사를 하며,

그는 여전히 다시 글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호네트의 인정투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게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그 근거를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서 찾고,

이를 위해 투쟁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하니까,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자족적인 만족이 아니라,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심리적, 안정, 나아가 성취감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그런즉 타자로부터 모욕, 무시를 받으면,

분노를 일으키고, 이는 사회적 투쟁을 일으키는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호네트는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인정투쟁을 함은 타자를 부정하고 무찌르고자 함이 아니라,

외려 자신을 무시한 이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제 존재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묘한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타자로부터 무시당하면 분노가 일지만,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저들을 마냥 미워하고 타기할 수만은 없다.

그렇게 되면 도대체가 인정을 받을 사회적 외부 장치가 파괴되고 말 것이다.

헌즉 인정받기 위해 승자가 되었다 한들,

그리고 상대를 노예로 삼았다한들,

상대를 마냥 객체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 객체들이야말로 자신을 인정할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반전은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헤겔의 입장은 자족적 만족이 부족한 이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의존한다. 

자족적인 사람일수록 외려 타자를 인정함으로써, 

더욱 자신의 가치를 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선,

타자를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것 그럴싸한가?

이런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방식은,

얼핏 협동적이며, 관용이 미만한 관계망의 세계인 양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엔 큰 함정이 있다.

자신의 인정을 여전히 외부에 의지하고 있으며,

그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해, 타자 역시 인정해야 한다면,

여긴 셈속이 작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전히 타자와 자신은 분리되어 있다.

이리 분리되어 있는 한,

양자 사이엔 끊임없는 긴장이 생성되고,

타자를 의식하고,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계 설정 하에선 비등점 높은, 그 예비된 갈등을 결코 벗어날 길이 없다.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연신 추천, 구독 버튼을 눌러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 양적 수준만큼 인정을 받고,

나아가 수익 구조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다.

이것은 인정투쟁을 넘어,

아예 타자에게 제 존재 전체를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에게 제 존재 증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주체는 증발되고 다만, 평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거세된 현장,

나는 유튜버들이 구걸하는 버튼 클릭 요구를 들을 때마다,

수익 구조에 함몰되고 만, 그리고 인정투쟁의 객체로 전락하고 만,

주체들의 표류(漂流)를 목격한다.

하지만, 의도된 이 표류를 통해,

자신의 이해를 도모하고,

연신 자기 셈을 그치지 않고 있다.


불교의 유식철학에 의타기성(依他己性)이란 말이 있다.


此由依他緣力故有,非自然有,是故說名生無自性性

(解深密經)


의타기성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가 다 아는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을 떠올리면 된다.

자성(自性)은 없고 다만, 존재는 인연의 힘에 얽매어 있는 것이다.


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이게 있으므로, 저게 있고,

이게 생하므로, 저게 생한다.


하니까 존재란 철저하니 관계망 속에 매어 있지,

별도로 주체적인 실체가 없다.

이게 기세간(器世間), 세간(世間) 속에서의 존재 실상이다.

이를 철저하니 깨달은 상태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한다.


인정투쟁이 일어나는 단계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성질’을 뜻한다.


호네트는 인정투쟁을 인간세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를 하였지만,

유식학에선 이것은 아주 기초 단계인 변계소집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의타기성이란,

결코 타자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인정 욕구를 만족시키자 하는,

합목적적 이해의 태도를 긍정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실상이 상호 연기(緣起)로 묶여 있음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연기로 묶여 있기 때문에 타자를 빌어, 내 존재를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이리 의욕하는 순간, 타자가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신은 가치 추구의 투쟁적 주체가 되고 만다.


유식에서 말하는 원성실성이란,

이런 타자의 의존성에 기초한,

타자의 수단화를 기획하지 않는 청정한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상태를 뜻한다.

유투버들이 자나깨나 구독, 좋아요 숫자에 연연하는 한,

저들은 변계소집성을 결코 여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죽으로는 언제나 입에 단꿀 바르고,

의타기성을 노래한다.

우리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도와주며 험한 세상을 헤치고 나아가자고 격동한다.

하지만, 그 이면엔, 타자를 수단화하고 동원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종국엔 이러함으로써, 고수익을 꾀하고자 함일 뿐이다.


나는 이들의 장사를 질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장사꾼이라면 이문을 남겨야 한다.

그러함이니, 장사꾼을 두고,

이문 남기려는 속셈을 어찌 마냥 탓할 수 있으랴?


지난 2004년 노무현은 시민들의 분양원가공개 요청에 대해,

"장사에는 열배 밑지는 장사도 있고 열배 남는 장사도 있다"는 논리로,

애초의 공약이었던 분양원가 공개를 뒤집었다.


그가 장사꾼이었다면, 그래 그를 굳이 탓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는 돼지 저금통을 흔들며,

서민들의 얇은 지갑을 털어가면서,

의타기성의 본질을 건드리며,

원성실성의 화체(化體)가 된 양,

자신을 선하다 선전하지 않았던가?

자기는 장사꾼이 아니라 하였음이다.


의타기성을 노래하며,

수익 창출하려 혈안이 된 일부 유튜버들은 장사꾼이다.

따라서 이들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생존권이 달린 주택 문제를,

장사꾼의 논리로 엿 바꿔 먹는 순간,

노무현정권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기억하는가?


당시 김근태의 계급장 떼고 붙자는 말을.

노무현 열성 지지자들 노뽕은 물론,

정치 곁꾼들은 모두 노무현을 경호하기 바빴다.

김근태 그는 변계소집성의 무리들에 의해,

날개가 꺾이고 끝내 버려졌다.


문재인정권.


그 역시 노무현 데쟈뷰 세상을 열었다.

그는 착한 박근혜이자, 장사꾼(을 위한) 변호인 노무현의 화신이다.


화신(化身, Incarnation)이 무엇인줄 아는가?

어떠한 실체가 형상을 달리하여 나타난 것을 이른다.

거죽 모양, 이름은 달라도 실체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노무현의 화신이 곧 문재인이고,

박근혜의 화신이 곧 문재인이라 함에 별반 잘못을 못 느끼겠다.

착한 박근혜 탈을 쓰고 등장한 문재인.

촛불 정신을 네다바이한 그를 보자하니,

과시 죽 쒀놓았더니 엉뚱한 이에게 절취당한 꼴이 아닌가?


지난 촛불 집회,

광화문 공장에,

나는 열 세 차례 참석하였다.


변계소집성을 여의지 못한,

저 착한 탈 쓴 무리들.

저들의 위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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