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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와 잡초 (一枝草佛)

농사 : 2019. 5. 30. 09:59


잡초를 베러 과원에 들어서면,

이내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예초기날과 풀에 집중하던 내 의식은 어느 덧.


풀밭을 얼음 지치듯 가는 나그네

밭이랑은 한 줄기 칠백리

나그네 소매 풀물에 젖어,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러다, 움푹 패인 곳에 발을 딛거나,

불룩 솟은 곳에 발부리가 걸리면,

몸이 잠시 흔들리며,

생각 하나가 푸른 연기처럼 지펴 올라간다.


스님네들은 머리칼을 곧잘 무명초(無明草o, 無名草x)라 이른다.

12연기(十二緣起) 첫 번 째가 무명(無明)이다.

愁歎苦憂惱

실로 이로부터, 걱정, 괴로움, 고뇌가 생긴다.

머리카락 역시 매번 삭도(削刀)로 민다한들,

잡초처럼 쉬이 되자라고 만다.


저들은 다시 자라고 마는 머리칼을,

잔나비 나무 그네를 타듯 이는 번뇌를 없애듯, 

쉬지 않고 민다. 


그럴 랑이면,

차라리 내버려 두고,

허무장발승(虛無長髮僧)이 되면 어떠하리?


고대 인도엔 62 가지 사상과, 96 종류의 외도(外道)가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 외쳤다.

이들 중 그 누구라도,

내가 그르다 하지 않았다.


세상엔 독신승이 있다면 대처승도 있고,

삭발승이 있다면 장발승도 있는 법.


잡초 역시 적이라 여기며,

악착같이 뽑고, 죽이는 이가 있는 반면,

나처럼 그저 설겅설겅 나무가 풀에 치이지 않을 정도만 다스리고,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이도 있는 것이다.



上堂。如明珠在掌。胡來胡現。漢來漢現。老僧把一枝草為丈六金身用。把丈六金身為一枝草用。佛是煩惱。煩惱是佛。僧問。未審佛是誰家煩惱。師曰。與一切人煩惱。曰。如何免得。師曰。用免作麼。

(五燈會元)


“조주종심(趙州從諗) 스님이 상당(당에 올라)하여 말씀하셨다.


‘손바닥 안에 든 명주(明珠)처럼,

오랑캐가 나타나면 오랑캐를 비추고,

중국 사람이 나타나면 중국 사람이 보인다.

내가 한 줄기 풀을 쥐고서는 키가 장육(丈六)이 되는 금부처를 (만드는데) 쓰겠으며,

장육의 금부처로 한 줄기 풀을 위해 쓰겠노라.

부처(진리, 지혜)는 곧 번뇌며,

번뇌는 곧 부처니라.’


중 하나가 여쭈었다.


‘(그렇다면) 부처는 누구의 번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말씀하셨다.


‘(부처는) 모든 사람에게 번뇌를 주느니라.’


‘어찌하면 (부처가 준 번뇌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다.


‘면하면 무엇 하게?’”


佛是煩惱。煩惱是佛。


조주의 이 말은 곧 煩惱即菩提와 같은 말이다.

여기 是나 即은 = (equal)과 같다.


조주가 이리 친절히 일러주는데도,

저 풋중은 연신 상대주의적 집착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번뇌 ↔ 부처,

고 ↔ 저,

호 ↔ 오


밝은 구슬에 가까이 대면,

모든 물건이 다 그대로 비춘다. 

구슬은 외부 물건에 하나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장애 없이 바로, 바르게 비춘다.


기실 오랑캐 사람과 중국인은 다르다.

계집사람과 사내 사람은 분명 다르다.


부처는 장육(丈六) 곧 키가 1장 6척이며,

일반 사람의 키는 8척이며,

풀의 키는 기껏 4치에 불과하다.


헌데, 조주는 풀과 부처를 같이 다루고 있다.

항차, 부처상엔 금으로 장엄까지 되어있지 않은가?


하지만, 부처의 눈으로 보자면,

平等無二

평등무이라,

차별이 없다.


오랑캐 사람이 나타나도 좋고,

중국 사람이 나타나도 좋다.


어떤 사람이 명주(明珠) 앞에 나타나든,

그 본성에 하나의 흠도 생기지 않는다.


佛是煩惱。煩惱是佛。


금도금한 부처를 보고,

그에 집착하여 빠지면,

그게 곧 번뇌다.

심중에, 나 바깥에 부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곧 집착심이며 분별심이다.

그러함이니 번뇌는 기실 바로 이 부처 때문에 일고 만다.


모든 중생은 자신이 곧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부처에 집착하고 만다.

그러함이니 부처가 번뇌를 일으키는 장본(張本)이라 할 밖에.


그러함인데도,

아직도 풋중은 다시 묻고 있다.


‘어찌하면 부처가 준 번뇌를 면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조주가 말씀하신다.


‘면할 필요 없다.

집착하지만 않으면 족하다.’


아, 저 풋중엔게 천둥 벼락 소리와 같이 들렸으리라.


아니 우둔한 녀석이라면,

아직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맛있는 고기반찬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가? 

하며 안절부절못하리라.


면하려고 할수록 번뇌는 더욱 깊어지고 말리라.


‘잡초는 적이다.’


99.9% 농민은 이리 생각한다.


여기 농장 근처에 별장을 지어 놓은 곳이 하나 있다.

집이 들어선 곳 말고는 전부 부직포나 비닐로 덮어버렸다.

그저께 그곳을 보았는데, 재주도 좋아,

두둑은 물론 고랑까지 한 치의 틈도 없이 도배장판 바르듯 덮어버렸다.

아니, 재주가 좋은 것이 아니라,

욕심이 많고, 집착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아, 

이로써,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며,

저들은 한참 뻐기지나 않았을까?


헌데, 과연 그러할까?

숨구멍을 모두 막아놓았으니,

도대체가 천기, 지기가 돌지 못한다.

미생물 역시 모두 죽어 자빠지고 말았을 터이다.

그러자니 자연 비료를 강제로 넣어주어야 하며,

병충해가 창궐하니 농약을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뿐인가?

매년 비닐을 걷고 이를 태우는 짓까지 불사한다.


이것이야말로 번뇌 아닌가?


잡초와 작물을 달리 보는 한,

번뇌는 연달아 일어나고 만다. 


번뇌가 싫어서 별 짓을 다하지만,

이내 또 다른 번뇌가 닥친다.


老僧把一枝草為丈六金身用。把丈六金身為一枝草用。


조주는 한 줄기 풀로써 금부처를 만들고,

금부처를 한 줄기 풀로 여긴다.


나는 그동안 충분치는 않아도,

그 이치를 더러 밝힌 바 있다.


(※ 참고 글 : ☞ 삼출물

                     ☞ 연기 ⅱ

                    그 밖에 천기, 지기를 언급한 연관 글들이 있다.)


用免作麼。


풀을 없애려 하지 마라.


혹,

아는가?


그리하면,

그대도,

풀 한 줄기로 금부처를 만들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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