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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縱橫四海)와 종횡무진(縱橫無盡)

소요유 : 2019.06.13 20:50


종횡사해(縱橫四海)와 종횡무진(縱橫無盡)


화엄경(華嚴經)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란 말이 나온다.

중중(重重)에서 重이란 거듭이란 뜻이다.

그런즉 重重이란 거듭*거듭을 묘사하고 있은즉,

단 한 차례만 거듭된 것을 넘어 한없이 중첩된 것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복잡한 구조를 지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국엔 자신조차도 스스로에게 되먹임(feedback)되어,

그 연환쇄(連環鎖, endless chain) 고리 구조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내포하고 있다.

중중이란 말에서 바로 이런 자기궤환(自己饋還)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그이는 공부가 제법 깊이 된 상태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중중이란,

대대(對對), 대자(對自)의 상대적 관계와 함께,

자자(自自)의 경계까지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옛날 우화 중에,

돼지가 일행을 세는데,

자기 자신을 세는 것을 잊어,

인원수가 하나 모자란다고 법석을 떨었다 하지 않았던가?

곧잘 사람들은 자신을 잊고, 

대경(對境) 상대화의 늪에 빠지곤 한다.


과시 因蔓不斷이라,

넝쿨의 얽힘처럼, 끊어낼 수 없는 실존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이다.

헌즉 도리 없이 다함이 없는 無盡인 것이다.


중중무진(重重無盡)에서 중중(重重)은 공간적 실상을 밝히고 있으며,

무진(無盡)은 시간적 실태를 지시하고 있다.

허나, 중중과 무진은 결코 서로 떨어진 사태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중중하면 무진한 것이고,

무진하면 중중할 수밖에 없으니,

하나를 두고 각기 묘사를 달리 할 뿐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 비유로써 묘사한 것 중,

특히 인상적인 글 하나를 소개해둔다.


疏。重重交映若帝網之垂珠者。第七因陀羅網。境界門。如天帝殿珠網覆上。一明珠內萬像。俱現諸珠盡。然又互相現。影影復現。影重重無盡故。千光萬色雖重重交映。而歷歷區分。亦如兩鏡互照。重重涉入。傳曜相寫。遞出無窮。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구슬로 짠 그물망이 있다할 때,

낱낱의 구슬 하나 안에 비친 상들은,

만상(萬象)을 품고 있다.

왜인고 하니,

구슬들은 서로가 서로를 되비추고 있은즉,

그 비춘 영상들은 끝없이 전체의 구슬 망들을 통해 다시 비추게 된다.

그래 이를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하는 것이다.


자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리나라에선 흔히 종횡무진(縱橫無盡)이란 말을 많이 쓴다.

하지만, 주윤발(周潤發)과 장국영(張國榮)이 출연한 영화명은 종횡사해(縱橫四海)라, 

이 영화 이후, 대중에게 종횡사해란 말도 과히 낯설지 않게 되었다.


종횡이란 종과 횡이니 온 천하를 대상화 하고 있으며,

자유자재(自由自在)로 거침없이 노니는 모습을 추상화하고 있다.


종횡가(縱橫家)들의,

합종(合縱), 연횡(連橫)이라는 것도,

전국시대 때, 진나라를 두고, 

나머지 6국이, 남북으로 합하고, - 合縱

거꾸로 서쪽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개별적으로 상대하여,

횡으로 연합한 것을 말한다. - 連橫


그러함이니 여기서도 역시 종횡(縱橫)이,

천하를 두고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 무진이란 말이 덧붙여져 쉼 없이 노니는 것을,

그리고 사해가 덧붙여져 온 천지 사방을 거침없이 노니는 것을 그려내고 있다.

하니까, 전자는 시간, 후자는 공간에 중점을 둔 표현법임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사해(四海)라니,

도대체 중국이 섬나라가 아닌 이상,

어찌 하여 사해란 표현이 나오고 있는 것인가?


사해에 대하여는 각기 다른 수많은 설이 따른다.


이중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그럴듯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본래 중국은 고대에 구주(九州)라 하여 전역을 아홉으로 나눠 칭하였다.

(九州 : 冀州, 兗州, 青州, 徐州, 揚州, 荊州, 豫州, 梁州, 雍州)

한즉 구주는 곧 중국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대 중국인들은 자신들 나라밖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여겼다.

그런즉, 이게 곧 사해(四海)가 되는 것이다.


(출처 : 網上圖片)


그러함이니, 이제,

중국은 거꾸로 해내(海內)가 되고, 

그 밖의 외국은 해외(海外)가 된다.


나아가, 

외연 확장되어,

사해(四海)는 곧 천하, 온 세상을 지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해외 운운할 때,

이게 바다 건너 외국이란 뜻으로 알고 있지만,

실인즉, 바다와는 상관없이 내가 사는 삶의 영역권 밖이란 의미인 것이다.

곧잘 해외라니까 바다 건넌 외국에만 쓰이는 것으로 알지만,

육지로 연결된 다른 나라도 해외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海가 바다이기도 하며, 때론 아니기도 한 사연을 바로 알 수 있으리라.


불교의 우주관에서도,

중앙의 수미산(須彌山) 주변에 바다가 있으니,

이를 사대해(四大海)라 이른다.


고대인들은,

인간 자신이 사는 곳은 땅으로 되어 있고,

그 밖은 바다로 되어 있다고 여긴다.

이는 바다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

단단한 땅 너머의 세상을 분리, 차단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아,

수미산 밖은 白浪滔天이라,

큰 바다 파도가 일어 하늘을 덮으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

허나, 紅塵滿地라,

아무리 단단한 땅일지라도,

홍진이 한번 불면 온 천지가 앞도 볼 수 없이 덮여지니라.


정작 밖의 바다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구주(九州), 수미산이야말로,

온갖 전란이 일어나고, 삶의 갈등이 때려지는 현장이 아니랴?


다시 돌아가, 이제, 

종횡사해(縱橫四海)와 종횡무진(縱橫無盡)의 뜻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종횡(縱橫)은 활동 공간이 온 천하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을 지시한다.

사해(四海)는 공간, 무진(無盡)은 시간 차원을 묘사하고 있는데,

전자는 종횡과 같이 온 천하를 지칭하고 있지만,

종횡이란 기세간(器世間) 공간 속에서의 구체적 활동의 미침이 가없다는 의미를 추상한다.

한편 후자는 그 활동이 그침이 없이 지속된다는 의미를 추상하고 있다.


이렇듯 이 양자는 자의(字意) 상으로는 차이가 조금 있다.

하지만, 그 지시하는 의미는 표면상의 차이를 넘어,

시공간적으로 활동이 자유자재로 이뤄져 거침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다면, 이제, 이게 장자에 나오는 소요유와 무엇이 다른가?


소요유(逍遙遊)


장자의 첫 편명이 소요유다.

유명한 첫 장면이 이러하다.


곤(鯤)이란 물고기가 있는데,

이게 새로 변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등 넓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른다.

날으면 그 날개가 구름처럼 하늘을 가린다.


붕이 한 번 날으면, 

물결 치는 수면이 삼천리요, 

올라가는 높이는 구만리가 되며,

6개월간을 간 뒤 쉰다.


北冥有魚,其名為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為鳥,其名為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者,天池也。齊諧者,志怪者也。諧之言曰:「鵬之徙於南冥也,水擊三千里,摶扶搖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


이 부분은 수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문학적, 철학적 과제를 던졌다.

장자가 편 저 웅대무비한 말의 바다 속에 빠져,

사람들은 기세 좋게 유영을 한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예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린다.

혹간 물속에 들어갔다 한들,

대개는 익사하여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붕새의 모습을 그리 그려내자,

매미와 어린 비둘기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제 날아도 기껏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갈 수 있을 뿐이다.

어떤 때는 미치지 못하여 도중에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무슨 소용으로 남방으로 가려고 구만리를 올라 갈 것인가?’


아아, 그렇다면,

소요유는 붕새만 할 수 있고,

매미와 같이 작은 존재는 불가한 것인가?


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며,

작은 해(年)의 길이를 아지 못한다.’


그런가?


종행사해를 하려 하여도,

영화에서의 주윤발이나 장국영처럼, 

천하 고단수 도둑질 할 능력이 없으면,

미술관을 헤집고 다닐 수 없는 것인가?


과연 그러함인가?


붕새가 구만리장천을 날 수 있다한들,

매미와 같이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맴맴 울며 한 여름 더위를 가시게 할 능력은 없다.

붕새가 水擊三千里라 날갯짓 한 번에 물결을 삼천리나 일게 할 수 있다한들,

비둘기처럼 콩알 주워 먹으며 구구단을 외지는 못한다.


내 비록 붕새처럼 구만리장천을 날아,

남명(南冥, 남쪽 바다)을 애써 가지 않는다한들,

여기 연천지경 블루베리 농장에선,

方百米를 남명이라 여기며 소요유한다. 


하늘가엔,

저 붕새의 날갯짓에 흘러온 구름이 매양 농장 위에 머무르고 있으며,

水擊三千里 쳐 올린 물이 절로 비가 되어 내린다.


適千里者三月聚糧。


천리를 가려는 이는 석 달 먹을거리를 준비하여야 한다.


허나, 適莽蒼者三湌而反,腹猶果然라.

가까운 들판을 가려는 자는, 

세끼 먹을 것만 가지고 가도,

돌아올 때도 배가 처음처럼 부르다.


方百米일지라도,

종행사해 노니는데 거침이 없다.


至人無己,神人無功,聖人無名。


지인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신인은 공적을 다투지 않으며,

성인은 이름(명예)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 나를 앞세우지 않고, 공적을 다투지 않으며, 명예를 탐하지 않으니,

方百米일지언정 어찌 붕새와 다름이 있을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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