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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바위에 지지 않기

소요유 : 2019. 7. 26. 13:22


야바위꾼들이 가령 카드나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나라면 저들에게 당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쉬이 하게 된다.

가령 Three-card Monte를 두고 말해본다면,

기껏 3패(牌) 중 한 패나 공 하나를 이리저리 옮기며 배치하면,

객은 자리 셋 가운데 패가 위치한 하나를 찾아내면 이기게 된다.

헌즉, 무작위로 찍어도 승률은 1/3의 확률이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다 내가 주의를 기우려, 집중하면,

그 승률이 훨씬 높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쉬이 가지게 된다.


(출처 : giphy)


그런데도 이들에게 걸리면 대개는 싹 털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왜 그런가?


사람들은 꼭 틀린 곳만 찍어내기 때문이다.


딴에는 아무리 꾼이 기술을 걸어도,

자신의 눈을 비껴갈 수 없다고 믿는다.


헌데, 저들은 저것으로 밥을 빌어먹는 직업 꾼이다.

거죽으로는 패를 다 보이고 노는 양 싶지만,

재빠르고 교묘한 손놀림으로 아차 하는 순간,

객들을 속이며, 짐작하는 곳이 아닌 곳에 패를 가져다 놓는다.


저 게임에 참여하여,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려면, 

저 야바위 현장엔 언제나 속임수가 따른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한다.

그러니, 여기 참여하는 자는 이를 역으로 치고 나가면,

조금 더 승률을 올릴 수 있다.


그 하나의 방법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이는 실로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하다.

진지하게 임하여, 판돌이의 손놀림을 따라 패를 추적하여 가되,

자신이 최종 옳다고 판단한 곳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셋 중 하나를 탈각 시킬 수 있다.

이제 남은 두 곳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그리되면, 확률은 1/2로 대폭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장난 치기 힘이 드는 카드가 아니라, 

컵 안에 공을 두고 노는 게임의 경우엔,

손 안에 공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컵 안엔 공이 없는 상태이다.


이 경우엔 어떤 컵을 선택한다한들,

그 안엔 공이 없기에 백전백패하게 된다. 

최후에 속임수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주기 위해,

선택하지 않은 나머지 컵을 뒤집어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 능숙한 재간으로 손 안에 숨겨두었던 공을 몰래 넣기 때문에,

이를 일반인이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돈을 잃고 싶지 않다면,

아예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이 이상으로 확률을 올리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려면 그가 속임수를 펴는 현장을 잡아내야 하는데, 

이는 객들의 시각(視覺), 시고(視高)를 벗어난 시야(視野)에서 일어나기에,

몰카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현장에서 육안 수준으로는 대처할 수 없다.

사람이란, 그리고 손 기술이란, 그 기량을 펴는 이에 대단히 깊게 매어 있다.

헌즉 기술을 펼 때, 일정량 bias가 걸리고, 편협된 곳으로 구속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편향 패턴을 오랜 시간 관찰하다보면,

어느 정도의 양식을 갖추고 시전(施展), 발현(發現)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허나, 그대가 여러 날 현장 출동하며, 

이를 관찰, 수집하기 전엔,

모두 다 파악할 수 없다.

게다가 야바위꾼이라는 게,

어느 하루 어리숙한 인간을 거덜 내고는,

당분간 그 자리엔 오지 않고,

먼 곳으로 떠나버리게 된다.

헌즉, 이런 떠돌이를 상대로 어찌 항구적 방책을 세울 수 있으랴?


현실이 이러함이니,

야바위에서 당하지 않으려면,

아예 참여하지 않는 게 수다.


그래도 유원지를 산책하다, 미처 가시지 않고 남은,

한여름 밤의 여흥(餘興)을 마저 즐기려면,

내가 일러준 방책을 원용하여 가볍게 즐길 일이다.


판돌이가 손재주가 뛰어나다면,

당신의 눈을 속인 곳에다 패를 가져다 놓지,

아무렴, 그대가 맞는다고 여기는 곳에다 가져 놓겠음인가?


그러함이니, 내가 제시하는 방법은,

속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가 배척하고,

제 믿음을 거슬러, 창끝을 자신의 목으로 돌리는 전법이다.


이때 순간, 삼십육계 중 이대도강(李代桃僵)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헌즉 잠시 살피고 지나고자 한다.


이대도강이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오얏(자두)나무가 죽다라는 뜻이다.

이대도강을 설명하려면, 

남송(南宋) 때의 곽무천(郭茂倩)의 시(樂府詩集·雞鳴)를 먼저 소개하여야 한다.


桃在露井上,李樹在桃旁,蟲來齧桃根,李樹代桃僵。樹木身相代,兄弟還相忘!


“복숭아나무 우물가에 자라고,

자두나무 그 곁에서 자랐네.

벌레가 복숭아나무 뿌리를 갉아먹으니,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딱딱하게 말라) 쓰러져 죽었네.

나무들도 몸 바쳐 서로 대신하는데,

형제는 외려 서로를 잊네.”


이대도강의 원문은 이리 되어 있다.

勢必有損,損陰則益陽。

그 뜻은 전쟁에선 반드시 손실이 생긴다.

그러니 국부적 손실은 불가피하니, 이를 인정하여,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대신 전국적 승리를 취한다는 뜻이다.


말은 그러한데,

이게 자신의 즉발적인 심리를 거스르는 것인 바,

실제 현실에선 결행하기 힘들기도 한다.


장기 속담에 기차보수(棄車保帥)란 게 있다.

장기 말 중 덜 중요한 것을 버리고,

중요한 기물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차가 중요하다한들, 궁만 하랴?


육친의 정(情)도,

실제 제 이해가 달린 문제라면,

엷어지고, 헤지고, 돌아서고, 급기야 척까지 지게 되니,

이대도강이란 마음이 굳세지 않으면,

범인(凡人)은 실로 행하기 어려운 전법이라 하겠다.


여기 점잖게 범인이라 하였지만,

숨기지 않고 바로 말한다면,

제 욕심에 목이 채인 이라 하겠다.

이러한 이가 대부분이라는 데 또한 우리네 삶의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이다.


기실 복숭아나무 곁에 자두나무를 심은 것은 사람이 꾀한 것일 뿐,

행여, 자두나무가 이를 달가워하였으리?


내가 블루베리는 물론이거니와,

텃밭에 키우는 고추, 가지, 토마토, 깻잎 등속도,

풀과 함께 키우고 있다.

그러자니 묘한 일을 접하게 된다.

흔히 외래종이라 불려지며, 잔뜩 미움을 받고 있는 돼지풀이란 게 있다.

이게 엄청 잘 자라고, 키가 한 길 반을 넘게 큰다.

그래 내 이를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저것이 저리 빨리 크니, 

필경은 질소분이 다른 풀에 비하여 사뭇 많이 있으리라.

그러니 벌레들의 공격을 많이 받겠거니 생각하였다.


왜 아니 그럴까?

다른 작물은 괜찮은데,

이 돼지풀은 특히 어릴 때, 벌레들의 집중 공격을 받는다.

하여 이파리에 구멍이 처참하니 숭숭 뚫리곤 한다.

그러자니 외려 다른 작물은 해를 피할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텃밭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대도강의 현장(現場) 모습 중 하나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풀의 생명력은 실로 대단하여,

가을이 되면 마치 갈대처럼 뻣뻣하니 장대 줄기를 하고,

그 마지막을 창칼의 기치(旗幟) 세워 장렬하니 마감한다.


나는 본디 모든 풀을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덩굴 풀, 가시 풀 등 블루베리의 성장을 심히 괴롭히고,

사람의 작업 동선을 방해하는 풀들만을 적절히 다스린다.


이대도강의 원리대로,

복숭아를 위해 자두나무를 부러 심지도 않으며,

다른 풀들을 위해 돼지풀을 애써 키우지도 않는다.

외려, 울 삼아, 농장 둘레길엔 돼지풀을 한껏 높이 자라도록 방임하고 있다.


기실 이 돼지풀에 관련되어 지금 이곳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차후 이곳에서 자리를 새로 깔고 정식으로 다룰 계획이다.


본디 야바위는 중국말에서 온 것이다.

押寶[yā//bǎo]

이 말은 동사+목적어 구조로,

동사가 자체적으로 목적어를 구비하고 있는,

소위 이합(離合)동사이다.

그 뜻은 놀음을 하다, 돈을 걸다, 내기에 건 돈(stake) 등의 뜻을 가진다.


야바위에서 쉽게 이기려 할 일이 아니다.

손재주, 눈속임을 업으로 하는 이를,

일반인이 어찌 이길 수 있으랴?

헌즉, 이기기는커녕, 빼앗기지 않으려면, 

애저녁에 저들을 애돌아 피할 일이다.


허나, 유흥(遊興)을 주체하지 못하여,

이를 즐길 수도 있는 법.

그러하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제시한 간단한 방법에 의지하여,

자신을 믿지 말고, 자신을 속이는 일에 종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제법 흥미로운 경험이 되리라.


이로써,

자신의 믿음이란 게 얼마나 가벼운가?

자신의 눈이란 게, 얼마나 허술한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한껏 기승(氣勝)하여 날뛰고 있는,

자신을 지긋이 관찰하고, 점검하면,

이 또한 여간 색다르고, 재미로운 게 아니다.


전번, 야바위 기술을 펴는 현장 스케치를 한 적이 있다.

이는 다음 글을 참고하라.


☞ 야바위 환술(幻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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