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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과 아날로그 무술

소요유 : 2021. 3. 12. 22:38


디지털과 아날로그 무술

혹, 홍수환과 파나마의 카라스키야의 대결을 기억하는가?


홍수환(洪秀煥, 1950.05.26.~)은 어느 날, 그와의 대결을 통해 문득 신화가 되었다.
마치,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0407-1850.04.23.)가,
자고 일어나니 문득 계관 시인(桂冠詩人)이 되었다는 전설과 거의 같다.

4전5기(四顚五起)의 신화를 그려낸 챔피언 홍수환.
그는 이기고 나자, 어머니와 통화하였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지 아무리 주먹이 세다 한들,
아들, 사내는,
엄마, 여인에게 보고하고 나서야,
자신의 머리 위에 쓰여진 월계관(月桂冠)을,
자랑스러히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전까지는 까짓 한낱 둥글게 말아 놓은 식물 타레일 뿐이다.
수컷의 한계 조건이란 이리도 어쭙잖다.

엄마 하고 외치는 순간,
비로소, 저 식물은 월계관 그 冠이 되는 것이다.
이 신기로운 환원 방정식, 연금술을 아시는가?
返老還童이라,
아무리 늙어 꼬부라져도,엄마 앞에서 어린 아기가 되고 마는 법.

아, 
자궁이여, 
胎자리여.

물론,
나는 이에 저항한다.
수컷으로서가 아니라,
아예, 애시당초, 이에 무관하다.
나는 性적 자기 한계성을 극복함을 넘어,
소요유’(逍遙遊)
즉, 상대, 절대를 넘은 내적 심미, 유심(唯心)으로,
밖이 아닌 나에게 충실할 뿐이다.
谷處者牧
골짜기에 처한 자는 가축을 기른다 하였다.
그래 나는 영혼의 목동, 
谷神일지니라.

나는 스포츠를 그리 즐기지 않았으되,
그때 그날,
부대원들은 모두 그의 경기 중계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광적으로 텔레비전 방송을 탐하였기에,
초병, 해안 경비 순번이 바뀌자,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고참들은 근처 민가로 기어들어갔다.
나도 끼어 들어가 텔레비전 앞에 죽 둘러앉았다.

중대에선 연신 바로 복귀를 종용하였지만,
중대장인들, 이를 적극 막아서지는 못하고,
슬쩍 못 본 체 방임하였다.

군데군데 헤진 곳이 기워졌지만,
그 익숙한, 마음이 탁하니 놓여 퍼지는,
노란 콩댐 장판 위에,
죽 벌려 앉아 경기를 관람하였다.

고참들은 어느새 준비하였는지,
오징어를 씹고,
소주를 까고 있었다.

도대체가,
이 누렇게 빛바랜 텔레비전 앞에서,
땀에 찌든 국방색들,
저 오금에 돌개바람이 들이차는,
환희란 얼마나 놀라운가?

헌데, 홍수환이 다운을 당하고, 전세가 기울자,
일순, 우리 모두 장탄식을 금치 못하고 끌탕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진작부터 카라스키야의 권법에 주목하였다.
그는 주먹을 내지를 때, 딱딱 끊어치며, 마치 로봇과 같았다.
이게 거죽으로 보기엔 사뭇 위력적이었다.
나는 곁에 있는 선임에게 카라스키야의 주먹은 위력적이지만,
끊어치는 모습으로는 결코 권법을 완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무술이라는 게 원환(圓環)으로 그 궁극의 끝을 아지 못하게,
영원으로 이어지는 양식으로 표출되어야 하는데,
카라스키야는 이 공간 양식을, 시간의 형식으로 나눠 갈라,
노일수(露一手)라, 한 수 한 수 시전(施展)하기에,
결코 최상의 권법을 지향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 선임은 사회에 있을 때, 나이트클럽 웨이터 일을 보았다 하였다.
나를 좋게 보았던지, 나처럼 일개 졸병이 휴가를 나왔을 때, 안부 편지까지 보낸 분이다.
나는 그에 비해 한참 철몰랐던 어릿배기에 불과하였다.
사물의 물정에 밝았고, 사려가 깊은 분이셨다.
그가 그립다.
그의 건승을 내내 기원하고 있다.

내가 오늘 태권도 영상을 보니,
양자도약(量子跳躍, quantum leap)
바로 이 카라스키야의 권법 형식을 다시금 보고 있는 양 싶다.
태권도 훌륭하다.
혹시, 태권도를 사랑하는 이라면,
이하, 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실 수도 있겠다.

헌데, 나는 지금 중국 무술을 생각한다.
중국 무술 일반은 태권도에 비해 사뭇 유연하고, 연속적이며,
디지털에 비해 아날로그적 행태 양식을 보인다.
가령, 카라스키야이라든가, 태권도처럼 딱딱 끊어치지 않고,
마치 원무(圓舞)처럼 동작이 연속적이다.

하여 나는 문득 생각한다.

‘태권도는 디지털적이고,
중국 무술은 아날로그적이다.’

手不能二事。一手畫方,一手畫圓,莫能成。

한 손으로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

한 손으로 사각형을 그리며,
다른 손으로 둥근 원을 그린다면,
도대체가 일을 완성할 수 없다.

김용의 소설을 보면,
이런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한 손으로 方을 그리고,
또 한 손으론 圓을 그리는 장면.
이것 둔한 사람은 쉬이 따라 하기 어렵다.

中國武術은 300종에 이른다고 한다.
혹 관심이 있다면,
여기를 참고할 일이다.
CGTN https://youtu.be/5sEvaYuaiKs?list=PLt-M8o1W_GdSL_pC-Y9qzGH6frtu-HO_f
   滑拳 https://youtu.be/PuGs61f8dyc
   泉州五祖拳 https://youtu.be/_vUygkA0Wl4
   白眉拳 https://youtu.be/rs4fw4sTGdg
   白猿通背拳 https://youtu.be/KalZ6WxVRqU 
   拂塵 https://youtu.be/gixTgjhKIMQ   少林三節棍 https://youtu.be/_CBKWd8RoDc
   少林鐵砂掌 https://youtu.be/kBqAhOzSeVE
   少林虎拳 https://youtu.be/qCnZRW7IWoE
   少林禅功 https://youtu.be/jJeevrWujsk
   少林達摩劍 https://youtu.be/QeS_MoiZz-4
   四川峨眉拳 https://youtu.be/xBbB9yKq5EY
   峨眉劍手拳 https://youtu.be/mW2ZHZcwTas
   峨眉羅漢拳 https://youtu.be/DrSmVJf2dhA
   咏春拳 https://youtu.be/dx6QDlPrCDc
   地術拳 https://youtu.be/Uh1cZJh5ZCk
   苗刀 https://youtu.be/u3IuBTDrji8
   江南船拳 https://youtu.be/B61TG4yD5Mc
   花拳 https://youtu.be/_f_2_zqq5PY
   儒家拳 https://youtu.be/fhXf1WbBOLA
   莫家拳 https://youtu.be/ESx3nuOCx_s
   ....
예서, 전래되는 다양한 중국무술을 소개하고 있다.

(utube)

디지털, 아날로그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하여 언급하려면,
날밤을 새우고서도 모자랄 일이다.

다만, 한마디 보탠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류에 휩쓸려,
디지털 세계가 다인 양, 이게 최고인 양,
이리 새기고 있다면,
이는 한참 부족하고도, 어리석다 하겠음이다.

가령,
여기 하나 생각해보련다.
양자역학은 하나의 인식 체계이지,
이게 진리를 절대적으로 담보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세계를 들여다보는 인식의 창, 그 형식의 하나일 뿐이다.
이게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라 생각하는 것이 나는 영 못마땅하다.
태권도의 그 절대 지향, 수도사적 절제성.
대단하다,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영원, 완성을 이룰 수 있는가?

나는 생각한다,
저 오랜 옛날 카라스키야의 권법에서 보듯,
저것은 결코 영원 지향이 아니라,
단지 오늘, 현실의 완력을 자랑할 뿐인 것을.
그것이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그 태도로 드러난 모습을 두고, 
내가 내린 심미안적 규정일 뿐이다.

중국 무술.
이게 오늘날, MMA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있지만,
나는 그 순수한 예술적 열정, 영원을 향한 애수 어린 도정을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꿋꿋한 자세란 얼마나 의연한가?
아날로그적 원초적 지향, 
그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鄉)이라,
그 원초적, 해방적 공간을,
저들 무한 원환무(圓環舞) 유희(遊戱) 형식을 통해 사유한다.
(※ 참고 글 : ☞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鄉))

이것은 이 한 치 없이 돌아가는 이 시대,
저 멀리 역사의 뒤안길에서 전해지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다.
들을 수 있는 이에게만 전해지는 저 비밀스런 언약의 말씀.

끝나지 않는 모험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게서도 신화, 전설의 양식으로 새벽 샘물처럼 솟아나온다.
내 영혼의 표주박으로 이 샘을 긷는 나는 매양 흥분한다.

마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정감 지향적인 열정, 그리고 지혜, 미적 감수성 ...
이것은 탈속한 것인즉,
링 위에서의 승부나, 거리에서의 싸움으로,
우열이 정해지는 범속(凡俗)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함이니,
만약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위·진 시대의 품격을 지닌 중국무술을 다시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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