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뽕과 봄풀

소요유 : 2021. 4. 11. 08:05


뽕과 봄풀

유튜브 영상을 보면,
매양 하나를 빨아주는 콘텐츠 일색인 것이 적지 않다.
이것 앞에서 지적한 적이 있기는 한데,
설혹 아무리 옳아도, 여기에 빠져들면, 심히 위험하다.

특히 국뽕이 심한데,
이것 아주 고약한 것이다.
역사상 국뽕질이 심할 때,
나라가 망할 때인 경우가 많다.

오늘의 허상에 취(醉)하여,
잠복된 위험을 몰각(沒覺)하고,
마지막 남은 자원을 탕진하게 된다.
집단적으로.

마치 굿해 먹고 흩어진 무당년 마당처럼,
타다 만 지화(紙花), 찢어진 오색기만 처량하니 굴러다닐 뿐.

사람이란 단순한 존재다.
무슨 의미인가?
어떤 자극으로 도파민, 아드레날린 등 호르몬 양이 많아지면, 
혈류가 증가하고, 동공이 커지며, 심장 박동 수가 늘어난다.
이때 급히 흥분하거나, 우울해지며, 
자기 강화 사이클을 확대재생산 하며 돌리게 되는 법이다.

이리되면, 합리적 생각이 차단되고, 
쉬이 감정에 휩쓸려, 무작정 앞으로 돌진하게 된다.
이러고서야, 어찌, 바른 판단과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으랴?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위험에 빠지고, 급전직하(急轉直下) 나락(奈落)으로의 추락뿐이 없다.

왜냐?
자원은 유한한 것.
저 흥분 호르몬은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없다.
사람 역시 유기체이고, 자원 공급에 한계가 있다.(이하는 圖解 참조)
따라서, 유기계는 급히 파정(破精)하여 overdamped되며,
시스템을 내적 한계 안으로 급히 수습한다.

이만 하여도 다행인데, 때론, 어떤 요인으로 인해,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잃고,
마냥 끝없이 질주하게 된다.
이것인 바로 그림의 divergence 상태에 상당한다.

눈사태(avalanche) 역시 역학적 감내 능력 한계를 넘어,눈덩이들이 쏟아져 내리게 된다.
이때 일차로 무너져 내린 눈덩이가, 2차를 유발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등등, ...
계차(階次)로 작용하여 붕락(崩落)이 일어나게 된다.

전자공학에도 열폭주(熱暴走, thermal runaway) 현상이라는 게 있는데,
열에 의해 전류량이 증가하고 이로 인해 다시 열이 증가하는 등,
연속적으로 positive feedback이 일어나,
종국엔 시스템이 파괴되는데 이르게 된다.

이 모두는 그림의 divergence에 상당한다.
그 경로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이를 일러 파국(破局, catastrophe)이라 한다.

국뽕 방송 마찬가지다.
자극이 자극을 불러내고,
수용자는 더욱 높은 수준을 요구하게 된다.

사이비 종교에 포섭되어,
통성기도를 하고, 방언을 할 때,
사람들은 묘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통해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엑스타시(ecstasy) 황홀경에 빠져들게 되면,
마약처럼 쉬이 그런 경험의 재구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어렵다.

하기에, 일주일 지나면,
손자 저금통이라도 헐어서,
다시 그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헌데, 자극 보급엔 한계가 있고,
그 강도(强度), 수준을 높이는데 더욱 과도한 자원과 정력이 소모된다.
그 어떠한 물리적 실체를 가진 시스템일지라도 이를 감당할 수 없다.
하여, 파정(破精)이 있는 것이지만,
무리를 하여, 이끌어내던 운동도,
끝내는 누적되가는 내적 모순을 다 해결할 수 없다.
하기에 사이비 종교의 끝은 휴거나 종말론으로 마무리하게 되는 법이다.
체제 모순을 來世로 이월시키는 것처럼 근사한 방법이 또 있을까?
거꾸로 이 방법은 現世에선 답이 없다는 말이 되겠다.

답이 없는데,
모여 있을 필요가 있겠음인가?
인증받은 자신들만 천국으로 올라가겠다는 저 욕망이란,
도대체가 얼마나 파정 후의 정액처럼 비릿한가?

이 은폐된 내적 경로를 이미 다 내다보는 이는,
언제나 그러하듯, 누구보다 먼저 마지막을 예비하게 되어 있는 법.
來世가 아니라 現世에서 방어, 이연, 또는 종결(closing) 처리를 하기 위해,
선동, 협박, 암수, 음해, 폭력, 살인 등,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는 게,
저들 사이비들의 일반적 행동 양식이다.

하지만, 교주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스스로 쳐놓은 그물에 갇혀 있다면,
자기가 만든 거짓 교설에 자기도 미쳐 들며,
교도들과 함께 마지막을 장렬히 맞게 된다.

鬚鬼 털중이의 방송 역시 이런 위험이 있다.
나도 한때, 저들 무리들이 꾸려나가던 나꼼수 방송을 즐겨 들었던 적이 있다.
헌데,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부터,
鬚鬼 털중이의 논조가 영 괴이하게 변질이 되더라.
(아니, 그의 본색이 이제야 내게 포착된 것이리라.
나의 안일함이란 도대체가.)
나는 위험을 느끼고, 급히 그로부터 이탈하였다.
그 이후, 나는 두어 번, 조사 확인 차 들린 적이 있으나,
일절 저 삿된 방송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무작정, 문가 무리들을 변호하고, 빨고, 닦기 바빴음은 물론,
적대 세력을 까고, 음해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미 저들은 털교(毛敎)의 교주가 되고, 교중(敎衆)이 되어,
저들만의 ecstasy, 그 황홀경(怳惚境)에 빠져들고 있었음이라. 

엊그제 끝난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
이십대 청년들은 저 털교의 교설이 얼마나 삿된 것인 줄,
홀로 알아차린 것이다.
60대 이상이야, 보수 편향 그룹이라, 평가에서 제외한다면,
오늘날 이 세대 중 깨어있는 이들은 오직 이십대 청년 뿐이라 하겠다.

저들 앞날에 축복과 영광이 함께 하길 빈다.
공허한 말 부주가 아니다.
나는 저들의 판단 능력에서 희망을 본다.

봄풀 앞에 서면 정말 경이롭다.
어제 밭에 난 풀을 보고 탄성을 질렀었다.
잠깐 사이 부쩍 자라 수북히 땅을 덮고 있더란 말이다.

아아,
이십대,
겨울에게 빼앗긴 들을 수복하는 저들의 용기, 정렬이라니,
봄풀만큼 장하구나.
내, 저들을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만, 과연 저들의 분노가 보상을 받을 수 있겠음인가?
승냥이 떠난 숲, 호랑이로 메꿔진다면,
도대체, 인민들은 어떠해야 할 노릇인가?

민주당과 국힘당은 결코 먼 거리로 나눠떨어진 사이가 아니다.
나는 꼴통 보수와 위선 보수로 나누지만,

김규항처럼 구보수와 신보수로 점잖게 나눠 정의하여도 좋다.
민주당을 두고 진보란 말을 더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주, 친일 세력 집단인 한민당으로부터 연원한 민주당을 두고 누가 진보라 부르는가?
지금의 거대 양당은 실로 수구 보수 정당 일색인 셈이다.
진보당은 이젠 장독대 뒤에서 가끔,
오락가락하면서 머리끝에 달린 댕기꼬리나 어쩌다 보일 뿐이다.

민주당이 싫다 하여, 표를 준다 한들, 국힘 밖에 없고,
국힘이 싫다 하여, 민주당외 달리 찾기 힘들 뿐이다.
심상정을 내가 질타하고 있지만,
기실 그가 조국 밑을 빠는 품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선거제 개혁을 통해 조금이라 의석을 늘리려는 고육책인 것을 왜 모르겠는가?
허지만, 양당은 서로 손을 잡고 위성 정당을 만들며,
알량한 개정 선거법조차 무력화시켰다.

심상정 혀는 이미 해져, 나달나달해졌다.
아, 한 때 나는 그를 그리 그리워하였음인데,
황량한 들판, 언제나 돌아갈 수 있으리요?

초록은 동색임이라,
풀색과 녹색은 매한가지라.
저들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지만,
먹는 식량은 하나로 같다.
그 먹이의 내용은 인민의 살과 피다.

그런즉 인민들은 시계 부랄 추처럼 매양 좌우로 왔다 갔다 할 뿐,
어느 하나인들 자신을 진정으로 대표할 정당을 찾아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즉 저들은 매양 번갈아 가면 분노의 표적으로 기능할 뿐,
돌아가 편히 쉴 귀의처는 딱히 없는 형편이다.

오늘날 양당제는, 
당료(黨僚)들의 부패, 권력의 사유화로,
본래 기대하였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 지 사뭇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해체를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이번 선거를 통해,
외려 보수 총량은 더 늘어났다.
한 되가웃도 되지 않던 진보는 더욱 쪼그라져,
한 홉도 남아 있지 않다.

대안이 없는,
이 시대의 아픔이란 도대체가.

모쪼록,
이십대는 오늘의 슬픔을 딛고,
지혜를 길러,
짓밟힌 들을 되찾길 기원한다.
겨울이 깊어도 봄은 오는 법.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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