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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초경사(打草驚蛇)

소요유 : 2021. 5. 10. 20:03


타초경사(打草驚蛇)

(출처 : 網上圖片)

어느 글을 읽는데,
타초경사를 끌어들이며,
설 하나를 읊어 대고 있다.
헌데, 그 전후사가 정확하지 않아,
과녁을 비껴가고 있다.

하여 글자 몇을 떨구어내고 만다.
먼저 터초경사의 출전을 훑고 시작한다.

본디 타초경사는 삽십육계(三十六計) 제 13번 계에 해당된다.
원문은 이렇다.

疑以叩實,察而後動;復者,陰以謀也。

여기 얽히 고사가 또한 재미가 있은즉,
소개하고 넘어간다.

唐朝的時候,有一個名叫王魯的人,他在衙門做官的時候,常常接受賄賂、不遵守法規。有一天,有人遞了一張狀紙到衙門,控告王魯的部下違法、接受賄賂。王魯一看,狀紙上所寫的各種罪狀,和他自己平日的違法行為一模一樣。王魯一邊看著狀紙,一邊發著抖:“這…這不是在說我嗎?”
  王魯愈看愈害怕,都忘狀紙要怎么批,居然在狀紙上寫下了八個大字:“汝雖打草,吾已蛇驚。”意思就是說你這樣做,目的是為了打地上的草,但我就像是躲在草里面的蛇一樣,可是被大大的嚇了一跳了!

요약하자면 이런 뜻이다.
당나라 때, 왕로(王魯)란 자가 있었다.
이 자가 법규를 지키지 않고 뇌물 받아먹는 관리임이라,
어느 날,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를 고발하였다.

왕로가 그 고발장을 일별하니,
이는 곧 자신을 고발하는 것임이라,
그는 흠칫 놀라 이리 말했다.

汝雖打草,吾已蛇驚。

당신이 풀을 (작대기로) 쳤지만,
정작은 내가 놀란 뱀이 되고 말았음이라.

그러니까, 타초경사란,
A를 격동시켰음이되,
실인즉 B를 놀래 경계코자 하는데,
그 뜻이 있다 하겠음이다.

헌데, 이것으로 족한가?
그렇다면,
내가 구태여 더 글을 내어,
자리를 더럽힐 것이 없다.

이제, 저 글을 앞에 두고,
내가 노니는 형식으로 글을 잇기로 한다.

풀밭에 들어가자면, 뱀에 물릴까 걱정이 적지 않다.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하면,
뱀이 먼저 알아서 달아나니 안심이다.

과연 그런가?

농부 하나 있어,
혹, 
병법을 바로 알고 있다면,
타초경사를 외치며,
오월의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나아간다.

헌데,
뭇 농부의 앎, 행위 양식처럼,
이게 온전히 뱀을 쫓기 위함인가?

내가 풀을 쳐내는 것은,
잠자는 뱀을 일으켜 세워,
앞서, 다치지 않게 함이라,
정작은 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저들이 내가 휘두르는 사나운 농장기(農仗器)에 다치지 않게 함임이라,
아아,
이 뜻을,
그 누가 있어,
제대로 알 수 있으랴?
(※ 참고 글 : ☞ 보암주(普庵咒))

打草驚蛇

내가 아니라,
남을 걱정하고 있음이니,
그 누가 있어,
타초경사.
여기 숨은 뜻을,
깊이 있게, 온전히 헤아릴 수 있겠음인가?

이를 아는 이가 혹 있다면,
빛 내리는 여기 농장 언덕배기에 함께 모셔,
웅숭깊은 우물에 넣어두었던,
차가운 수박 한 덩이 꺼내,
탁주를 함께 하며,
먼산 흰 구름을,
벗하며,
유월의 노래를 부르리라. 

아시는가?
그대, 인간에게 있어,
뱀이, 범이, 멧돼지가 무서운가?

어림없는 소리.
실인즉, 저들 입장에선 도대체가 사람처럼 사납고 두려운 존재가 없다.
저리도록.

사람 하나가 있어,
풀밭에 들어간다 하자.

대부분의 인간은 뱀을 무서워 하나,
정작 뱀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하지만, 하나도 무섭지도 않은 풀섶을 작대기로 쳐대며,
외려 거기 숨은 뱀을 놀라게 할 수 있음이다.

내가 아니라,
풀에 숨은 뱀들이 농장기에 혹여 다칠까 봐,
어이, 훼훼,
저들을 앞서 불러내,
경계코자 하는 이 안타까운 마음을.

이게 바로 打草驚蛇의 함의(含意)다.
B가 아닌 A를 격동시켜,
정작은 B를 위험으로부터,
경계하고자 하는 그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이다.

이를 그저 적을 물리칠 계책으로만 여기고 있음이니,
밤낮 실패한 모택동 뒤꽁무니만,
털중이처럼 매양 빨고 자빠질 뿐인 것을. 
거기서 물건 받아 삼천리 곡곡 누비며 보부상 노릇하던,
팔육이에 이르러서는 무엇을 다시금 논하랴?

문재인 너무 얕볼 일이 아니다.
그는 타초경사로 놀랄 위인이 결코 아니다.
풀을 작대기로 쳐대든,
火宅임이라,
불을 싸질러대든,
놀랄 화상이 아니다.

아무리 불에 불을 거푸 질러대어도,
그는 법화경에 나오는 저 어린아이들의 珍玩之物이라,
그 갖은 진기한 물건에 넋을 빼앗겨,
아무리 바깥에서 갖은 양념질로 꾀어내어도,
결코 火宅을 벗어나길 원치 않음이다.

아마, 코로나19 종식을 원하는 것 중 제일 큰 하나는,
중단되었던 공짜 세계 일주를 다시 재개하는 것이 아니겠음인가?
그의 꿈이 마저 이뤄지길 나도 축수(祝手)한다.

저 무리들,
爭出火宅이라,
결코 불난 집을 다투어 빠져나올 위인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함이니,
어찌 고작 풀을 막대기로 쳐대는 것으로,
저 모진 독사의 단꿈을 경계할 수 있으랴?

모택동이, 한 타스로 몰려오든,
저 달님, 달무리들은, 
면산(綿山)에 숨은 개자추(介子推)처럼,
아무리 불을 지른들,
차라리 타죽을지언정,
결코 하산할 위인이 아니다.

개자추는 절개가 푸르러 만고의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건만,
문재인은 혼암(昏闇)으로, 사시장철 잿빛 마른 볏짚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고뇨.  

아아,
저 꿋꿋함이란.
도대체가.

이는 운명이다.
부엉이 바위,
아니 올빼미 바위가,
다음 차에,
기다리고 있다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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