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처처개옥處處皆獄

상학(相學) : 2021. 8. 12. 10:31


대저 사물의 상相이란 그 표상表象 형식이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이런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有心無相 相隨心生 有相無心 相隨心滅

‘마음이 있어도 상이 없으면, 상이 마음을 따라 생기고,
상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상은 마음을 따라 멸한다.’

우리가 운동 경기를 대할 때,
감독은 떡 하니 마이크 잡고 서서 이리 떠벌리곤 한다.

‘우리는 꼭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무장되었기에 승리할 것이다.’

이 말 제법 그럴싸하다.
하지만, 저것은 고정된 의미 공간 축 내에선,
혹여 어쩌다 유효한 결과를 도출할지라도,
시간 축에 사영射影하면 지연time-lag가 있기에,
실제 현실에선 바로 나타나는 게 쉽지 않다.

有心無相 相隨心生

마음에 새로운 바람이 일면,
상이 바뀐다.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짓는 태를 따를 수 없다.
남모르는 덕(陰德)을 많이 쌓으면,
언제고 복이 따르리.
하지만,
마음에 따라 상이 바뀐다 한들,
인고의 시간과 적덕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게 바로 앞에서 말한 시간 지연의 뜻이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 익어가지 않으면,
결코 각오, 결의는 현실태現實態가 되지 못한다.

술을 담글 때,
주모가 이르길 이번엔 정성을 다하였으니 잘 될 것이야.
이리 말하였다 하여 곧바로 술이 되는가?
석 달 열흘이란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는,
제 아무리 정성이 하늘에 가닿는다 한들,
내일 술은 익지 않는다.

따라서 저 감독의 말이,
시간 역사의 존재증명이 되려면,
그 앞선 고련苦鍊과 그 성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하지만,
俗人之心 處處皆獄이라,
하룻밤에도 잠자리에서 지었다 허무는 빌딩이 여남은 채에 이르고,
도심 한 가운데 살면서도,
심산에서 축축 늘어진 나뭇가지 타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잔나비보다 더 마음이 바쁘다.
속인의 마음은 이리도 처처가 모두 지옥이다.

(출처 : 網上圖片)

누군가 하나 있어,
제 모용貌容과 마음이 다르다 하고 있다.

제 말과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하나,
마음은 이와 달라 반듯하다고 이르고 있다.

허나, 내가 보기엔 둘이 짝하여 아주 잘 어울리고 있다.
제대로 관상을 뜯어보면,
상相과 심心이 쌍쌍이 얼싸안고 춤을 잘 추고 있다.

境隨心轉 相隨心遷이라고,
대경은 마음 따라 전변하고,
상은 마음 따라 옮겨간다.

결코, 상相과 심心이 무관하여,
일만 팔천리 상거相距 나눠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저이는,
공연히 제 못난 인물을 제물로 삼아,
비뚤어진 마음을 구할 일이 아니다.

心猿意馬라,
마음은 잔나비처럼 이 나무 저 나무로 날 듯, 돌아다니길 즐기며,
뜻은 말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동쪽, 서쪽으로 내달기 바쁜데,
어찌 얼굴 상에 윤이 날 것이며,
뱉은 말에서 은쟁반 위를 구르는 옥소리가 날 수 있으랴?

공연히 변명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치고, 덕을 바로 쌓아,
새 나라의 새 사람이 될 일이다.

***

나는 앞에서 링컨이 말하는,
 “40대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 져야한다”를 비판한 적이 있다.
(※ 참고 글 : ☞ 링컨의 얼굴)
(※ 참고 글 : ☞ 일구견인심(日久見人心))

글, 말, 얼굴

이것 기실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거죽은 다 꾸며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有心無相 相隨心生

여기서 말하는 것은 관상의 기본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지에 오른 관상학 대가는,
살집은 물론이거니와,
살가죽 밑에 숨은 골격 상相을 간파하고,
피부색이라든가, 안신眼神을 법식대로 잘 감별하며,
그 숨겨, 감춰진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살을 저미고 붙이는 짓은 물론,
뼈까지 깎고, 플라스틱을 덧붙이 요망한 짓을 다하는 즉,
아무리 숙련이 잘된 관상쟁이라도,
제대로 상을 보기가 수월한 노릇이 아니다.

그러한즉, 관상을 잘 보려면,
종국엔 면상面相이 아니라, 
심상心相을 헤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허나,
대저, 

察見淵魚者不祥,智料隱慝者有殃。

‘연못 속 고기를 잘 볼 줄 아는 이는 상서롭지 못하며,
남의 비밀을 잘 헤아려 알아내는 사람은 재앙이 닥친다.’

옛 주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음이다.
공연히 남의 마음을 엿보는 일 역시 아름답다 할 수 없다.

그러함이니, 
남의 일에 기웃거리지 말고,
一舉一動一思一念
수선修善이라 제 스스로 착한 마음을 기르고 닦을 일이다.

내, 어떤 이가 하나 있어,
제 마음보는 곧고 바르다 뻐기기에,
그의 상을 다시 면밀히 훑어보고는,
그게 그러하지 않은 이치를 적어보았다.

하지만,
남을 탓할 일이 아니라,
제 마음을 닦는 일에 미치지 못하는 바라,
나의 허물을 경책하는 데 이르고 말았다.

멈춰 서서,
옷깃을 다시금 가다듬는다.

'상학(相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口歪  (0) 2023.01.29
성형과 관상  (2) 2022.11.14
취왜(嘴歪)  (2) 2022.09.24
반이(反耳)  (0) 2021.07.04
논상(論相) 욕구  (0) 2021.06.16
와잠(臥蠶)  (0) 2021.06.02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상학(相學) : 2021. 8. 12. 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