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징거의 접시
슐레징거의 접시
(출처 : 網上圖片)
저 이미지를 올려 두고는,
떡하니 슐레징거의 접시란 표제어를 단 글이 있다.
(※ 내가 양자역학을 배울 당시 슐레징거라 하였는데,
요즘은 대개 슈뢰딩거라 이르고 있다.
나는 친숙한 말을 따른다.)
이는 아마도 슐레징거의 고양이 (Schrödinger's cat)를 패러디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양자역학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선전하고 있다 하겠다.
유리창 안에 접시는 명확히 깨지지 않은 상태다.
게다가 문을 열면 바로 떨어져 깨지게 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적 해석 공간 안에 있지 않다.
기실 인생이란 바로 저런 불안태의 연속 운명 속에 갇혀 있다.
그런즉 저것은 슐레징거의 접시가 아니라.
곧 그대 당신들의 접시일 뿐이다.
양자역학은,
유리창을 열기 전 한 가지 스테이트로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것 인간의 이성적 또는 감성적 지각 한계를 벗어나 있다.
그런즉,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 애 쓸 일이 아니다.
세상의 물리 현상이 꼭이나 우리 이해 영역 안에 있으란 법은 없다.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가 깨우칠 것은,
그 내용이라기보다 차라리 이런 세상의 모습을 겸허히 수용하는 열린 태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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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think you understand quantum mechanics, you don't understand quantum mechanics."
양자역학에 대한,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의 이 말처럼 널리 알려진 것이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양자역학이 불확실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오관,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 있다는 말이다.
(출처 : 網上圖片)
그러니, 그저 수용할 밖에.
아니면 수학이란 기술記述 도구를 넘은,
보다 근사한 툴을 새로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든가?
그도 아니면, 도를 닦아, 육신통(六神通)을 얻든가?
슐레징거는 잠재태(潛在態) 또는 가능태(可能態)의 함의를 처음으로,
수학적인 표현 도식인 확율공간 형식으로 도출해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눈을 가진 인간이다.
그는 과학자가 아니라 어둠을 응시하는 미학자라 할 밖에.
현실태가 될 때,
하나의 스테이트로 고정된다.
저 여러 가능성이 중첩된 잠재태를 뚫고,
하나로 고정되는 현실태의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은,
외부와 교섭할 때이다.
나는 이를 ‘시간의 만남’이라고 푼다.
(※ 참고 글 : ☞ 대(待)와 중(中) - (時用, 時義, 時中))
강태공은 80세가 되도록 벼슬하나 없이,
처는 떠나가고, 가난과 버티며,
곧은 낚시질을 하였다.
그러다 서백창(西伯昌)을 만나,
주나라를 세우는 대업을 이룬다.
곧은 낚시질로 그는 시간의 강물 속에서,
수많은 중첩된 양자 상태 물고기를 겨냥하였다.
그러다, 드디어 창을 만나고 뜻을 편다.
강태공은 과시 양자역학을 아는 장부라 하겠다.
彼丈夫也,我丈夫也,
아아, 그러함이니, 사내장부의 만남은,
서로 간 배짱이 맞아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될 뿐인 바라.
지위를 굳이 나눌 일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어디로 조르르 달려가,
절개를 꺾고, 종이 되지 않고,
자신이 장부임을 자각하였기에,
그는 양자 역학이란 장막을 찢고 나와,
하나의 state가 되었다.
양자역학의 대가가 되었으리라.
이는 그가 시중(時中)을 아는 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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