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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렁거리는 오후

소요유 : 2021. 10. 11. 10:09


그는 왜 이리 덜렁거리는가?

손바닥에 왕자(王字) 새겨놓고 역풍을 맞더니만,
이번엔 기수를 돌려 예배당 행이다.
(※ 참고 글 : ☞ 이 시대의 주초위왕)

(출처 : fnnews, ⓒnews1)

덜렁거리는 그의 양옆에 선 이들을 보라.
저들은 성경책을 옆구리에 착 안착시켜 껴안고 있다.
대개 찬송가책을 더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고 둘인 경우가 많다.
나는 예수교도들은 얼굴만 보아도 구별할 수 있다.

有心無相 相隨心生 有相無心 相隨心滅

‘마음이 있어도 상이 없으면, 상이 마음을 따라 생기고,
상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상은 마음을 따라 멸한다.’

저들 얼굴엔 남들과 다른 독특한 面形이 있으니,
이는 거의 고착되다시피 하여, 척 보면 그의 신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윤을 부액(扶掖)하듯 양 옆에 시립한 저들의 모습은,
특유의 예수교도들처럼 역시나 단정하다.
윤은 성경책을 아래로 거꾸로 잡고 연신 흔들며 걷고 있다.
나는 이것만 보아도 그는 결코 예수교도가 아님을 알겠다.
역시 그는 무교에 어울린다. 

이재명이는 그리 하수상한 짓을 많이 하더니만,
이젠 가을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가는 쓰레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기 농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탄강도,
멀리서 보면 제법 그럴싸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스티로폼, 농약통 등이 둥둥 떠다닐 때가 적지 않다.
산하는 인간이 다 망가뜨리고 있다.
인간은 이제 지구에서 쫓겨나, 추방당하고 말 것이다.

플라톤 국가에 나오는 장면이다.

만약 마법반지가 두 개 있어서 하나는 지게스와 같은 착한 사람이, 다른 하나는 나쁜 사람이 낀다면 꼭 나쁜 사람만이 투명인간이라는 점을 이용해 나쁜 짓을 할까? 플라톤의 작은형 클라우콘과 큰형 아데이만토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목동 지게스처럼, 원래 착한 사람도 욕심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사람과 똑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절대적인 힘을 얻고도 욕심을 채우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자라는 핀잔을 들을 것이다. 사람들은 올바름과 착함 그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수나 평판 때문에 올바르게 행동한다. 올바른 사람보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생각하므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선은 아름답기는 하나 힘들고 수고로운 반면, 올바르지 못한 길은 손쉽고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이 때문에 플라톤은 ‘위대한 스승님’ 소크라테스에게 ‘올바름(善)’ 그 자체가 왜 좋은지를 증명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은 믿음의 존재가 결코 되지 못한다.
하기에 한비자는 진작부터 법치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법이든, 신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중개자(仲介者, intermediary)가 있는 한, 
인류는 영원히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영매(靈媒, psychic)를 구(求)하지 말 일이다.
만약 그대가 신을 믿는다면, 최소 신과 직거래 할 일이다.

암호화폐는 이 중개자(매개자)없이 신뢰를 구축하는 방법을,
블록체인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구현하였다.

가령 목사는 신의 말씀을 전한다 하지만,
때론 신의 배반하고,
제 뱃구레에 술과 떡을 처넣기 바쁜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 신도들이 저들을 단 위에서 몰아내야 하지만,
외려 둘러싸고 여전히 돈을 투척하고, 딸을 바친다.

저들은 신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도적떼들을 믿음의 초석으로 생각하며,
정작 구하던 신을 잃는다.
도적이든 아니든 저들에게 중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초석 그 자체이고,
이의 훼손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고통이다.
결국 저들은 신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다.

거대한 핑계.
저들에게 신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먼 곳에 있다.

세상엔 언제나 착한 목사, 악한 목사가 존재한다.
성왕, 폭군이 번갈아 등장한다.
그래 한비자는 사람을 구할 일이 아니라, 

법에 의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참고 글 : ☞ 비룡은 구름을 타는가?)

하지만, 문제는 법의 운용을 또한 사람이 한다는 점이다.
보아라,
윤석열이나 이재명 다 법률가 출신이다.
저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법에 의지한 정의를 말한다.
하지만, 저들의 행동이 과연 법다운가?

사토시, 차움은 바로 사람이 인발브되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그래 탄생한 것이 암호화폐인 것이다.
여긴 인류의 아름다운 소망이 담겨 있고,
위대한 도전과 모험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저 ‘사기’다 무작정 이리 접근하지 말고,
마음을 열고, 좀 더 차분히 공부하며 내막을 알아보길 소망한다.

법이나 신을 만나러 가는 골목엔,
이리 삥을 뜯는 조폭이 가로막고 있기 일쑤다.

그래 절대 반지를 녹여 없애버려야 한다.
이게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다.

설혹, 절대 반지, 절대 권력이 남아있다 한들,
우리는 깨어나 저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사람은 하나의 인격이 된다.

나는 생각한다.

절대 반지(One Ring), 절대 권력(王), 절대자(神)는 없다.
아직 남아 있다면, 저들을 깨부수고서야,
인류는 영원한 잠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란 소설이 문득 생각난다.

한국의 정치 지형은 휘청거리는 오후처럼,
마냥 덜렁거리며 여의도벌을 걷는 이,
대장동 뻘밭을 기어가는 이,
이 해괴한 이들로 인해 잔뜩 구겨져 있다.

저들 반지들을,
너희 마음 속에서 추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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