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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와 觀

소요유 : 2021. 11. 18. 20:23


視와 觀

온 세상이 디지털(digital)로 뒤덮여있다.

하지만 디지털이란 아날로그의 근사식(近似式, approximate expression)과 같은 것.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디지털이 마치 진리의 대변자요 진리치인줄 안다.
하지만, 디지털은 지 아무리 날고 뛰어도,
현실을 정확히 묘사하지 못한다.

그는,
사사오입처럼, 
미치지 못하는 것은 버리고,
넘치는 것은 거둬,
소맷자락 안으로 수습하여,
이 거친 세상을 언듯건듯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갈 뿐이다.

追求快速和金錢

제 신념을 버리고,
속도와 금전 추구에 올인하는,
오늘날 현대인의 욕망 방정식에 딱 어울리는 문법이다.

이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은 내가 진작에 소개해둔 바 있다.
(※ 참고 글 : ☞ code - ①)

양자역학은 세상이 양자화(量子化, quantization)되어 있다 한다.
이것 아무리 머릿속으로 궁리를 터도,
직관적으로는 쉬이 납득되어지지 않는다.

E = hν

프랑크 상수란 징검다리 돌로 양자화된 세상이란,
아무리 생각하여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저 머리로 그리 셈하거니 할 뿐이다.

피리는 몇 개의 구멍을 뚫고 음계(音階)를 배설(排設)하고,
바람에 가락을 실어 내보낸다.
이 음계들 사이에 숨어 있는,
수많은 가락, 곡절들은 그럼 어찌 할 터인가?

피리쟁이(號笛手)는 요성(搖聲), 즉 농음(弄音)이란 기교를 빌어,
마치 흔들 다리를 건너듯,
그리 손과 입술을 떨면서,
소리의 스란치마 입고,
음계의 계단 사이를 즈려밟고 건너간다.

자연의 소리를 사모하여,
대나무에 혈(穴)을 파고 흉내를 내었으되,
그 재주란 게 음계 이상을 넘질 못한다.
하여 농음 등의 기교를 피어,잃어버린 소리를 전별한다.
(※ 참고 글 : ☞ 소통(疏通)과 죽통(竹筒))

도대체, 양자와 양자 사이의 간극은 그럼 무엇인가?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사고의 시각(視覺)은 수학, 물리학에 갇혀 있다.
수학, 물리학 이 틀을 벗어난 그 무엇이 있다면,
양자가 아니라 가령 질자(質子)를,
양화(量化)하지 않고 바로 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깥에 나가 하늘을 보라.
구름이 떠가고 있다.
구름 안이 알갱이로 단차를 이루며 나눠져 있던가?
심지어 구름과 하늘 사이조차 나눠져 있다 이르기 어렵다.

즉 무한연속(infinite continuos)으로 경험하지,
이산적(離散的, discrete)으로 나눠져 경계에서 도약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수학이란 머리로 사물을 분별하는 틀임이라,
세상을 수로 분절하고, 그 너머는 무한소(無限小), 무한대(無限大)로 퉁쳐버리고 만다.

아아, 퉁쳐버린다고 하면, 수학자들이 나무라겠다.
칸토르는 이 무한 세계를 처음으로 탐험하고, 비밀을 밝혀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가뒀지만,
정작 정신병원에 들어갈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지.

가령 그의 지도교수였던, 크로네커는 칸토르를 두고,
수학계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끌고 있다고 악평을 하였다.

하여간 이 자리는 수학을 깊이 있게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
나의 거친 말을 양해할 일이다.
나는 칸토르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다.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집합론부터 공부할 일이다.

내가 방금 간만에 맑은 하늘을 보고 왔는데,
가슴으로 하늘, 구름을 치어다보면 그저 곱고 아름다울 뿐,
그 경계가 없이 바람 따라 흘러갈 뿐이다.

사람은 외물을 보고,
사고할 때, 
산가지(算筹) 꺾어 셈하고,
범주로 나눠 갈래를 진다.

고대의 홍범구주(洪範九疇)는 물론 음양, 오행, 주역 등은
역시 사물을 인식하는 이산적(discrete) 셈판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머릿속에 희뿌연 안개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을,
어찌 부여잡겠음인가?
그러니, 적당한 잣대로 갈래 짓고, 이름을 붙여 둘 수밖에.
그리고 한가할 때, 이를 보태고, 빼며 셈 할 뿐인 것을.

세상의 수많은 언어 중 우리 한국어는,
연속적 대륙을 잃고 이산적 섬으로 유배된 이후에도, 
제 고향을 그리워하며, 
섬세한 감각어를 발달시켜왔다.

가령 매운 맛을 두고 이리 표현한다.

맵다.
매콤하다.
칼칼하다.
얼큰하다.
맵싸하다.
얼얼하다.
....

신(辛)

이 뚝 잘라 토막쳐낸,
미각 음계의 징검다리 아래에 떠내려가고 있는 미아(迷兒)를,
손내밀어 건져내며 언어 이전의 본향(本鄕)으로 귀향시킨다.
아니, 정작은 이런 행위를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기억의 대륙으로 귀환(歸還)한다.

그래 나는 한국어를,
자신의 본향으로 귀환하는 수구(首丘)의 나룻배라 이른다.

常事曰視,非常曰觀。

일상 상태에서는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볼(視) 뿐이지만,
비상한 사태에 이르러서야 그 본질을 관(觀)할 수 있다.

하지만, 오고가는 거래는,
경계에 그 때(時)가 자라고,
기미가 안개처럼 일어 번지는 것.

그러함이니,
세상살이는 산가지 꺾어 머리로 셈한다 한들,
가령, 가슴 속에 번지는 정한처럼,
셈판으로는 결코 셈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그러한즉,
그대 당신이 정녕 청산(靑山)과 벗하려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살어리랏다.
그대 당신이 정녕 녹수(綠水)와 벗하려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살어리랏다.

칸토르는 이리 말했었지.

"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
"The essence of mathematics is its freedom."
‘수학의 본질은 그 수학이 갖는 자유로움에 있다.’

그 누가 있어,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가?

살아생전 수학자로부터 수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당대 최고로 손꼽히는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는 이리 말하였다.

“No one shall expel us from the Paradise that Cantor has created.”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 

디지털 세상은 모든 게 아니다.
그 너머 더 큰 세계가 있음을 기억하라.
여기 안주할 일이 아니라,
자유의 깃발을 높이 흔들 일이다.

끝으로 힐베르트가 한 말을 여기 남겨 두며,
오늘 잠깐 마음에 일어난 파문을 이리 두서없이 적어둔다.

“We must know — we will know!”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음계와 음계 사이의 정수(整數) 사이엔,
그보다 더 많은 곡절과 사연을 지닌 실수(實數)가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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