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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마스크

소요유 : 2022. 3. 1. 14:39


코로나19와 마스크

코로나19가 온 지구를 덮치자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게 되었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이것 참으로 근사하다 싶었다.
쉬이 경험하기 힘든 이런 공간을 은밀히 즐기며 행복해하였다.

사람들은 제 얼굴, 몸매로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지우고,
그들로부터 필요 이상으로 과도, 과소한 평가를 받으며,
때론 고무되고, 때론 의기소침하지나 않았던가?
그러하기에, 비싼 돈 들여 얼굴에 칼을 대고,
배때기에 구멍을 뚫고 지방을 흡입하는 등,
이 처절한 짓을 불사하는 이들이 좀 많은가?

만약 인류가 앞으로도 내내 이리 마스크를 쓰고 지내야 한다면,
성형외과는 다 굶어 죽을 것이며,
추남, 추녀는 한결 지내기가 수월할 것이다.

我只是我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하지만, 대개는 본래의 자기를 평생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켠에 치어놓고,
이리 자기를 버리고 남에 의해 형성된 모습을 부여잡고 살지나 않는가?

페르소나(persona)
  outward or social personality
  외적 인격, 사회적 인격, 가면 쓴 인격.

하니까, 바깥으로 드러난,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personality가 자기인줄 착각하고, 
가면 아래에서 웃고, 떠들며, 한 생을 지우고 만다.
설혹 안다한들, 이를 벗어나는 게 쉽지 않음을 알고는 체념하기도 한다.
 


--- 나를 만나려고 ---

           검은새(오타와족)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산다.
우리 인디언에게
이보다 중요한 건 없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
남들 위에 올라서는 것?

그런 건 우리에게 중요치 않다.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마른 나뭇잎처럼 하잖은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을 
충실히 살려고 애를 써왔고
나를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혼자 들판을 거닐면서
침묵과 빛으로
마음을 채우는 걸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며칠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코요테가 된 것처럼 목이 말랐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걷자.
문득 오타오족 검은새가 생각났다.
그래, 
검은새와 함께 노래할 수 있는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정작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서야,
불현듯 자기 내면을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된 현대인들은,
코로나19야말로 축복으로 여길 일이 아니랴?

만약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마치 뜨물 위를 부유하는 늬처럼,
어디 머무르지 못하여 안절부절못하지나 않았는가?
잃어버린 가면을 다시 주어 써야겠다며,
마스크 벗을 날을 기다리지나 않았는가?

나는 개인위생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 그리고 그 백신 공부를 하면서, 
접종을 하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찾아내었다.
하여 이제껏 접종을 하지 않고 있다.

욕먹을 소리겠지만,
마스크를 조금 더 쓰고 살면서,
사람들이 정작은 평소 삶 속에서야말로, 
가면 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역시 덕이 되지 않으랴?
이런 생각을 짐짓 해보곤 하였다.

기실 자신을 잃고, 페르소나(persona)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도 부족하여 사람들은 다시 가면을 쓰고 놀이를 하지 않던가?
서양의 가장무도회(Masquerade, 假裝舞蹈會)나 우리네 탈춤은,
우리가 얼마나 가면으로 가려진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我只是我
내가 나로서 사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사회적 지위, 역할 속에 갇혀 정작 자기를 잃고 방황하지 않던가?
사람들은 가장무도회에서 평소 원하는 가면을 쓰고, 한바탕 질펀하게 논다.
하지만, 그 뿐인 것을.
시간이 흐르고 막이 내리면,
얼굴에 쓴 가면은 녹아내리고,
걸친 망토는 허물처럼 벗겨지고 만다.

그리고는 다시 일상의 가면 속의 삶으로 복귀하고 만다.

링컨의 “40대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 져야한다”는 말은,
너무 편협되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얕다 하겠다.
고작 40대 얼굴 하나에 일생의 인격을 고착시키다니.
그는 아바타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하겠다.
(※ 참고 글 : ☞ 일구견인심(日久見人心))

가장무도회는 유예된 억압일 뿐,
인간을 영원히 해방시키지 못한다.
저것은 평소 쓰고 다니던 가면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거대한 자기기만 장치에 불과한 것을,
속 쓰린 배를 움켜쥐고 새벽에 귀가할 때,
재우쳐 깨닫게 된다.
슬픈 운명이여.

선사(禪士)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잃어버린 본래(本來) 면목(面目)을 찾겠다고,
좌복에 구멍이 나도록 수행을 한다.

속인들은 가장무도회로 가면을 바꿔 쓰며 축제를 벌이고,
수도승들은 가면을 벗겨버린 본래의 모습을 찾겠다 생고생들이다.
가여운 중생들이다.

이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음인가?
모두 진저리쳐지는 이 진세(塵世)에서 고심참담(苦心慘憺) 애를 쓸 뿐인 것을.

(2020, 우리 농장에 핀 매화, 본지풍광 本地風光)

그럴 양이면 차라리 주체적으로 가면 놀이를 할 일이다.
나는 그 전형으로 아바타를 꼽는다.
能變現神通
12면관음(十二面觀音)처럼 능히 역할에 맞춰 변신하여,
제 능력을 걸림 없이 시현할 일이다.
이제 아바타는 가면이 아니라,
내가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창조적인 역할놀이(role playing)로 나투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十一面者。前三面慈相見善眾生。而生慈心大慈與樂。左三面瞋面見惡眾生。而生悲心大悲救苦。右三面白牙上出面見淨業者。發希有讚勸進佛道。最後一面暴大笑面見善惡雜穢眾生。而生怪咲改惡向道。頂上佛面或對習行大乘機者。而說諸法究竟佛道故現佛面。各爾三方三面為化三有故現三面若合本面應十二面。而十一面是方便面。本體常面是真實面。面離於身而智面主面表內懷以顯權實。故常面上現十一面。故曰十一面也。神呪心者。人既叵思大士所說神呪法亦難測也。神者難測也。呪者勅責也。心者慮智也。經者彼云修多羅。亦云經也常也。漢地風俗聖人所說皆名為經也。今大聖所說故目之為經。前賢今聖雖歷永劫所說經常故也。
(十一面神呪心經義疏)

십일면에 대한 설명 내용이 흥미롭다.
앞부분만 대충 추리면 이렇다.
전삼면은 자상(慈相)으로 선한 중생을 대하고,
좌삼면은 진면(瞋面)으로 악한 중생을 대하며,
우삼면은 백아상출면(白牙上出面)으로 정한 업을 지은 자를 대하고,
나머지 일면은 폭대소면(暴大笑面)으로 선악잡인을 대하여,
각기 알맞은 곳으로 인도한다. 

관음은 12면(十二面)을 넘어,
일면사비(一面四臂), 삼면사비(三面四臂), 삼면육비(三面六臂), 십면팔비(十面八臂),
십일면이십비(十一面二十臂),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으로,
자유자재로 변용, 변신되지 않던가?

(※ 참고 글 : ☞ 아바타)
(※ 참고 글 : ☞ 分身, 化身)

양무제 때의 보지선사(寶誌禪師) 이야기는,
내 글을 이해하는데 재미있는 시사(示唆)가 된다.
잠깐 소개를 해두고자 한다.

양무제가 보지선사를 존경하여, 화공으로 하여금 그 존영을 그리게 명하였다.
하지만, 보지선사의 얼굴은 수시로 바뀌었다.
화공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그려야 할지 몰랐다.
하여, 선사에게 정격(定格, regular)의 얼굴 모습을 보여 달라 청하였다.
그러자 선사는 십이면관음상(十二面的觀音像)을 보였다 한다.
아아, 그 수려한 모습이란, 자비상도 보이고, 위맹한 모습도 보이고 ...
결국 화공은 놀라 그림을 더는 그리지 못하고 붓을 놓고 말았다.

어느 날, 보지선사가  양무제와 함께 강변 경치를 구경하는데,
어떤 물건 하나가 강을 거스르며 떠가고 있었다.
선사가 지팡이로 물건을 건져 올렸는데,
자전단(紫旃檀) 나무였다.
양무제는 그 전단목에 선사를 조상하도록 명하였다.
다 만들고 나니 실물과 같았다 한다. 

이젠 당신 자신도 저 보지선사처럼 아바타를 통해,
백만 천 억 관음으로 나툴 일이다.
자유롭게.
마치 우리 농장의 매화처럼 본지풍광(本地風光) 여여하게.

십이면이란 상징 지시어일 뿐,
무한 확장하여 가없는 우주를,
거침없이 백 천 억 얼굴로 나아갈 일이다.

이게 이 시대,
진정 관음이 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게 메타버스가 되었든, 유니버스가 되었든, 차별은 없다.
제 재간껏, 우주를 즐겁게 유영할 일이다.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마스크로 가르쳐준 고통스럽지만,
돌이켜 회향(廻向)한 즐거운 선물이다.

코로나19로 돌아가신 분께,
삼가 향 한 자루 피어 올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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