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알 수 없어요

소요유 : 2022. 5. 3. 21:53


내가 근래 어느 남의 페북(facebook)에서 지내느라,
여기 블로그에 글을 자주 쓰지 못하고 있다.

거기 페북 주인이 이런 글을 썼다.
그는 지금 경제적으로 힘이 드는가 싶다.
초등학생 딸아이를 등교 시키며, 
버스에 탄 아이의 모습을 이리 그려내었다. 

“다리가 아직도 바닥에 닿지 못한 모습을 보니까 세상일이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는 결의와 투지를 다시금 다지게 되었다.”

이 글을 보자 내가 이리 댓글을 달았다.

足矣

장의가 뜻을 얻지 못하고 불우한 시절.
억울한 모함을 받아 흠씬 매타작을 당하였지.
친구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온 장의가 처에게 이리 말하였다.

張儀謂其妻曰:視吾舌尚在不? 其妻笑曰:舌在也。儀曰:足矣。

"내 혀가 아직 붙어 있소 아니오?
붙어 있소.
됐어!“

과연 그는 후에 진나라로 들어가 재상이 되어,
세 치 혀로 연횡술(連衡術)을 펴며,
온 천하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

oo이에게도 남에게 없는 훌륭한 재주가 있음이니,
足矣라,
그것으로 되었지 않은가?
뭣이라 앞일을 걱정하랴?

쩨쩨하게 궁상 떨지 말고,
oo이는 힘내시라.
응원한다.


그의 페친이 내 글에 이리 댓글을 달았다.

이선생님의 응원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기실 나는 페북에 가입은 하였지만,
글 하나도 올리지 않고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이리 댓글을 단 분과는 몇 번 그곳에서 마주쳐 글거래를 한 적이 있다.
다른 페친과 다르게, 나만 거의 유일하게 비판적 글도 서슴지 않고 올리고 있음인즉,
저런 댓글을 주셨음이다.
그런즉, 내가 이어 글응대를 하였음이다.

雲從龍,風從虎。
虎嘯谷風至,龍興景雲起。

범이 골짜기에 대고 포효하면, 바람이 이르며,
용이 하늘을 날면, 구름이 일어난다 하였음입니다.

대개 이를 두고,
‘범이 포효하면, 골바람이 이르며,
용이 날면, 빛나는 구름이 일어난다‘ 말하지만,
저는 문법 벗어나, 조금 달리 풀어보았습니다.

아무리 용, 범이라도,
지향처 없이, 때 없이 허공에 대고 삿대질한다고,
바람이나 구름을 불러들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범이 골짜기에 대고 소리를 질러야 골바람이 불며,
용이 하늘 경관에 대고 흥을 일으켜야, 비로소 구름이 일어나는 법이지요.

이를 상초(相招), 상치(相致)라 하는데,
서로 부르고, 이에 이른단 뜻입니다.

다만 이런 부름에 응하기 위해선 동기(同氣) 즉 기운이 같아야 합니다.
이 때라야 감응(感應)이 따르는 법입니다.

공학에선 이를 resonance(共鳴)이라고 합니다만,
사물엔 다 고유진동수(natural frequency)가 있는 바,
무릇 같이 울 수 있는, 떨 수 있는 존재 조건이 있는 법입니다.

'떨림'

大扣則大鳴 小扣則小鳴 不扣則不鳴

내 흉곽(胸廓) 속 안도 필경 오동나무 속처럼 비었으리라.
허니, 한 줄기 바람 자락 앞에서도 그리 서걱거리며 매양 울리라.

반도체 역시 L, R, C 이 삼요소가 적절히 식각, 적층 배치되어,
기운을 품고, 풀며 전자기적 기능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미 이는 제갈공명의 팔진도에서 구현이 되었었지요.
오나라 육손은 돌무더기로 쳐놓은 공명의 팔진도에 갇혀 꼼짝 못하게 되는데,
저는 이게 바로 반도체의 원형 효과와 동일한 것임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한편, 주역에선 이를 同聲相應,同氣相求이라 이르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때와 처處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닦음이 많아도 빛을 발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즉 평생 한을 품고 스러지는 아까운 인재도 적지 않지요.

아무리 품종이 좋은 씨앗이라 한들,
적당한 땅에 안착이 되어야 싹이 돋고 자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씨앗의 명운이란 도시 알 수 없는 바임이라,
허다하니 그저 썩어 없어지고 말 뿐,
어쩌다 운이 좋은 것만 살아남습니다.

연꽃 씨앗은 수천 년이 지나도 죽지 않고 있다가,
좋은 인연을 만나면 그 때라서야 싹을 틔웁니다.
隨之時義 천년 때를 기다려 활짝 꽃을 피웁니다.

하지만, 마냥 때를 기다리지 않으려면,
同聲相應,同氣相求의 이치를 깨우쳐,
豫之時義라 미리 때를 알고,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게 제 힘으로 아니 될 때,
우리는 곧잘 모처 모방(某方)에서 귀인을 만났게 된다는 신탁의 말씀을 구하기도 합니다.

아아,
과연 우리가 그리온 님은 어디에 계시온 것입니까?

한용운은 이 이치를 시로 수 놓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천고에 더는 비할 수 없는 절음, 절창이라 하겠습니다.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아아,
우리네 그리운 님은 어디에 계시온지? 


댓글란이라 길게 글을 쓸 수 없었은즉,
미처 다하지 못한 것이 있었은즉,
하나 더 남겨 둘 것이 있음이라,
여기 마저 적어두고 못 다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한다.

항우(項羽)가 유방에게 몰려 패퇴하는 장면은,
뭇 장부의 심금을 울린다.  
항우가 겨우 28기와 함께 도망을 가다, 오강(烏江)에 이른다.
나루를 지키던 정장(亭長)은 배를 내주며,
이를 타고 고향에 가서 재기하라 권하였다.

(출처 : 網上圖片)

그러자 항우는 이리 말하였다.

我在會稽郡起兵後,帶了八千子弟渡江。到今天他們沒有一個能回去,只有我一個人回到江東。即使江東父老同情我,立我為王,我還有什麼臉再見他們呢。

“내가 회계에서 기병 후 8000명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지만,
지금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오직 나 혼자 살아돌아간들, 강동 사람들이 나를 동정하여 왕으로 받들어준다한들,
내가 무슨 염치로 그들을 다시 만나겠는가?”

그리고는 장렬히 싸우다 기진하고는,
끝내 자결하고 만다.

후대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은 오강에 이르러,
시 하나를 남기는데, 사람들은 이 시를 고금에 드문 명시라 차탄한다.
바로 이 시를 마저 일러주지 못하였기에,
이에 여기 남겨두려는 것이다.

題烏江亭

勝敗兵家事不期,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捲土重來未可知。

이기고 지는 병가의 일은 기약할 수 없네.
수치를 품는 일은 남아답다 하고,
강동 자제는 뛰어난 인물도 많으니,
권토중래할는지 어찌 알 수 있는가?

하니까 한 때의 수치를 참지 못하고,
큰 뜻을 접은 항우에 대하여 애석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장부답지 않다고 항우를 나무라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에 동조하여, 두목의 이 시를 만고의 절창이라 이르고 있다.

그런가?

하지만 왕안석(王安石)의 다음 시는,
두목과는 아연 다른데, 정치가의 안목은 또 이리 다를 수도 있음이다.

烏江亭(疊題烏江亭) 

百戰疲勞壯士哀,中原一敗勢難回。
江東子弟今雖在,肯與君王卷土來?

두목의 시는 실의에 빠진 이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왕안석의 시는 영웅 하나에 집중되지 않고,
인민들을 의식하며 사회적 인식 지평을 열어젖히고 있다.

원래의 주제를 빗겨 가지만,
여기에 이르렀음이니 본래의 글은 마감하고 아예 그대로 빗겨간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자는 측과,
평화 협정을 맺고 전쟁을 그쳐야 한다는 측의 대립이 있다.

인민들은 도탄에 빠져있는데,
미국은 무기를 팔아먹으며 우크라이나 인민들의 피를 구하고 있다.
젤렌스키와 같은 정치가는 자칭 영웅이 되고 있다.
(※ 참고 글 : ☞ 몽중신인(夢中神人)과 젤렌스키)
(※ 참고 글 : ☞ 역성공다(力省功多))

병피(兵疲)
고스란히 인민들만 전쟁으로 피폐되어 가고 있는데,
영웅들의 권토중래라는 게 무슨 한가한 노름이란 말인가?

허나, 항우는 강동 자제를 다 잃고 무슨 염치로 살아 돌아가겠는가 묻고 있다.
개인적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왕안석이 지적한 인민들의 병피를 뒤늦게 깨달았음인가?

두목처럼 이 행동을 쩨쩨한 장부의 처신으로 보는 게 옳은가?
아니면 인민들의 兵疲를 살펴야 한다는 왕안석의 시선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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