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
심심한 사과
(출처 : mt)
우리 때는 이런 말 곧잘 하거나, 듣고 자랐다.
요즘 아이들은 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심심이란 뜻은 실로 다양하다.
甚深하다
지극히 깊다.
深深하다
깊고 깊다
심심하다
맛에 대한 표현
심심하다
따분하다
이 가운데, 아이들은 고작 하나의 뜻으로만 새기고 있다.
딱한 노릇이다.
언론엔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대략 세대 간의 단절로 이 현상을 진단하고 있다.
나는 이게 모두 거죽만을 살피고 있을 뿐,
근원적인 원인을 제대로 짚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있다.
한글이 뜻글자가 아니고 소리글자라는 것이다.
소리 문자라도 어소(語素)에 의미 단위를 찾을 수 있기에,
기실 의미를 떠난 문자란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뜻글자인 한자와는 분명 다르다.
한자는 글자 자체가 의미를 함장하고 있다.
단순 의미 어소를 넘어 언어 조직 전체가 이런 기초 위에 짜여져 있다.
앞에서 보았듯,
‘심심한’은 단순 소리의 결합에 불과하지만,
한글엔 한자어가 많이 끼어 들어와 안착되어 있다.
甚深하다
深深하다
하니까, 한글은 거죽으로는 소리글자이지만,
알고 보면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을 그저 소리로 표기하였을 뿐,
실제는 뜻글자인 양 해석 처리되어야 하는 게 부지기수다.
논쟁적 비판 영역에서의,
한글 전용이 옳다, 한자병용이 옳다 따위를 말하고 있는 아니다.
현실의 언어생활에서 우리는 뜻글자인 한자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이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생활 아니 생존 언어 존재 조건이다.
따라서 한글, 한자 시비를 떠나,
올바른 언어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싫어도 한자어에 대한 이해를 해두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를 소홀히 하여,
언중 간의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는 발화자가 온전히 책임을 질 문제가 아니라,
수화자가 자신의 게으름, 안일함, 미숙함, 발달 지체 상황을 자각하고,
부끄러움을 일으켜야 하는 과제 상황이 펼쳐진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영어라고 아니 그러한가?
라틴어란 언어 샘에서 의미가 흘러나와 형성된 것 태반이다.
따라서 교양인이라면 라틴어를 우리네가 한자를 배우듯,
심도 있게 배워 두어야 언어생활을 원활(圓滑)하게 할 수 있다.
이리 볼 때,
세상의 소리글자는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원을 찾아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종마루에 신비로운 신화와 전설이 서려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심장이 뛸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나는 저 경관 앞에서 이런 흥분을 일으킨다.
언어는 개념(concept)을 담지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좁다란 대롱으로 즉발적으로 이해(conception, 상상)하고 만다.
이것은 비극이다.
이 성마르기 짝이 없는 천박함이란 도대체가.
교육 현실의 실정.
한자를 추방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
문해력(文解力)이 떨어지는 이들로 가득찬 사회는 얼마나 불행한가?
concept 甚深하다를 심심하다(따분하다)란 자기식의 conception 일방에 도달하고 마는,
얼치기들이 횡행하는 사회란 얼마나 끔찍한가?
이런 상태로는 인문학뿐이 아니고,
과학, 기술 연구나 발전도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concept 하나를 두고,
만인이 만인의 이해 방식에 매몰되고서야,
어찌 학문이 바로 확립될 수 있으랴?
甚深하다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아이들로 그득 채워지고 만다면,
앞으로 백년, 천년이 흐르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런 얼치기, 쭉정이들로 무엇인들 제대로 지켜지고, 발전할 수 있겠음인가?
한심한 세태다.
경박스런 교육 당국을 탓하기 이전에,
낱낱의 개별 인격 주체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각자는 언어생활을 바로 영위하기 위한 자신의 바람직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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