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묵
(신당역 살인 사건 단상)
평소,
손잡고, 어깨 걸고 나가,
밥 먹고, 술 잔 나누면서,
그 누가 있어 흉한 사람 노릇을 하랴?
아니 외려 선하고, 의로운 양 자신을 한껏 꾸미지 않을까?
그러니,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사람은 대개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기 십상이다.
하지만, 어쩌다 길을 걷다 어깨를 부딪치거나,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잠깐 흔들려 발이라도 밟힐 양 싶으면,
기분이 확 상하면서 상대가 슬쩍 미워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심한 일을 당했다한들,
어지간해서는 상대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설혹 살의를 느낀다한들,
막상 일을 저지르지는 않고 참는다.
신당역 살인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무슨 곡절이 있는지,
내가 모두 다 알 수 없다.
따라서 섣불리 사건 자체에 대하여 말 수저를 얹지는 않겠다.
다만, 아래 기사들을 접하고는 한 생각 일으켜 본다.
(※ 출처 : sedaily)
이 의원은 이날 오후 서울시의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시정질문을 하던 중 이같이 말하며 "(가해자가) 31살 청년이다. 서울 시민이고 서울교통공사에 들어가려면 나름대로 열심히 사회생활과 취업 준비를 했을 것"이라며 가해자를 감쌌다.
그러면서 "가해자든 피해자든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나"라며 "다음 주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는데 아버지의 마음으로 미뤄봤을 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억장이 무너질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 출처 : viewsnnews)
이 두 기사를 접하자,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닌 한,
곧잘 쉬이 방관자 역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을 재삼 확인하게 된다.
저 사건에서 죽임을 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외려 가해자의 입장을 헤아리고 마는,
저들 왜곡된 심리 구조를 잘 들여다보라.
전자(기사)는 피해자의 죽음은 관심의 밖에 밀려나 있다.
가해자를 향한 좋은 인상만 길어 올려지고 있다.
여기 비뚤어진 관람객 하나를 목격하게 된다.
바른 의식을 갖추고, 사건 전체를 조망하고,
균형 있는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저 부실한 인격이라니.
저들은 펼쳐지는 우리들 삶에 진지하지 않다.
다만 연극이나 영화를 보듯 소비할 뿐이다.
소비는 우리들의 기호를 충족하고, 즐거움을 준다.
고통에 빠진 실재 현실은 다만 저 무대나 필름 속에서 산화될 뿐이다.
나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이 하나가 하극상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는 인간 하나가 이리 말했다.
‘저 아이가 원래는 착한 아이였는데.’
그래 내가 말했다.
세상에 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나쁜 짓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사람은 언제나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쁜 짓을 저지른 이상,
그는 더 이상 착한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피해자 앞에서 이런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면,
이거야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하는 엉터리 인격이라 할 밖에.
흉하다.
(출처 : 網上圖片)
더 놀라운 일이 이어 일어났다.
저 하극상 아이의 집에 묵을 쒀서 갖다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래 그게 무슨 작태냐 물어보니,
‘자신은 할 도리를 하였을 뿐이다.’
이리 답하였다고 한다.
그럼 하극상의 피해자에겐 금덩이라도 갖다 주었단 말인가?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 일은 자기가 겪지 않은 이상,
남의 일이고, 영화 관람으로 소비되고 말 재미있는 장면일 뿐이기에.
사람은 말이다.
저 후자(기사)의 예에서 보듯이,
한가롭기 그지없는 것이다.
제 일이 아닌 한 사람은 이리도 역겨운 괴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리따운 한 생명이 꺾였는데,
외려 가해자의 안위를 걱정하고,
두둔하기 바쁘다.
이게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인 것이다.
나는 저들 기사를 보고 하나도 놀라지 않는다.
이미 적지 않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저러함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자신과 별반 깊은 관계도 아닐 터인데도,
저리 가해자 편에 서서 염려를 늘어놓는 영혼들.
서울시의회 안에도 이런 한가하고 파렴치한 인격들이,
마치 몽유병환자처럼 홀을 부유하고 있다.
그러니 혹여 저 가해자가 권력을 쥐었거나, 돈이라도 많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음인가?
아마, 피해자를 욕하고,
저 가해자에게 묵을 쒀서 갖다 주고,
꽃다발을 바치며 머리를 조아리고도 남을 것이다.
녀석, 그리 염려가 깊다면,
교도소 다리 아래 움집이라도 짓고,
옥수발이라도 들라지.
이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숨겨진 그대 당신들의 마음 조각일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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