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파순(魔王波旬)
어느 날 한 인간 있어 진동으로 켜놓은 휴대폰 둔 곳을 아지 못할 새라,
온 집안을 다 뒤졌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찾아내질 못하였다.
문득, 들은 바 있음을 상기해내고는,
구글 휴대폰 찾기 기능을 이용해 30초 만에 찾아내었다.
그러자 그는 앓던 이가 빠졌다는 듯,
휘, 휘파람 불면 한숨을 놓더라.
내 이 장면을 보자,
한 생각 일어 그를 한껏 농하노라.
눈이 어두우면 귀라도 밝을 일이며,
귀가 어두우면 눈이라도 밝을 일이로되,
눈도, 귀도 다 쇠하여 졌으니,
앞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시인의 감수성은 이러하다.
눈이 망가지고, 귀가 막혀도,
마음이 아직도 꽉 조인 거문고 줄처럼 팽팽하다면,
까짓 이목(耳目)이 쇠한 것이 무슨 대수랴?
윤사월(閏四月)
박목월
송홧(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직이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아무리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도,
마음의 눈이 뜨이면,
송홧가루를 보고, 꾀꼬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법.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광(師曠)이란 악사가 있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지만, 전심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급기야, 마음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하나로 통일하지 못하는 것은
눈으로 너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광은
쑥에 불을 붙여 눈을 태웠다.
그 후 비로소 그는 천하제일인 득음(得音) 득청(得聽)의 경지에 이른다.
실제 고대 樂에 밝은 이들은 대개 장님이었다.
制曲奏樂이라고 고대 師는 樂을 담당했다.
하여 저 師자 돌림 악사가 적지 않다.
어제는, 감각을 덜어내 안에 숨겨진 제 본성에 충실하려 하였으나,
오늘은, 거죽 외양의 감각을 부추겨 채찍질을 가하며,
끝 간 데 없이 질주하려고 온 세상이 분주할 따름이다.
공자의 스승인 악사 사양(師襄)에 대한 이야기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온다.
사양은 본래 경(磬)을 치는 관원이었으되 거문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공자가 사양에게 거문고를 배우는데, 이들 간의 대화를 엿보자.
襄子曰:「吾雖以擊磬為官,然能於琴。今子於琴已習,可以益矣。」孔子曰:「丘未得其數也。」有間,曰:「已習其數,可以益矣。」孔子曰:「丘未得其志也。」有間,曰:「已習其志,可以益矣。」孔子曰:「丘未得其為人也。」有閒,曰。孔子有所繆然思焉,有所睪然高望而遠眺,曰:「丘迨得其為人矣。黮而黑,頎然長,曠如望羊,掩有四方,非文王其孰能為此?」師襄子避席葉拱而對曰:「君子聖人也!其傳曰:《文王操》。」
사양이 보기에 공자가 거문고에 이미 익숙해졌으니,
이제 다른 것을 배워도 되겠다 하자,
공자는 아직 수(數)를 터득하지도 못하였다 말한다.
여기 수란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기법, 묘리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자는 공자에게 수(數)를 연습하여 익숙해졌다 말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그 뜻을 터득하지 못했다 이른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지는데,
그 차서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琴 → 數 → 志 → 為人
공자의 배움이 종국엔 為人의 단계에까지 이른다.
丘迨得其為人矣。黮而黑,頎然長,曠如望羊,掩有四方,非文王其孰能為此?
이제야 비로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보면 검고, 키가 크며,
멀리 보면, 아득하여, 사방을 다 덮고 있음이니,
이는 문왕이 아니면 어찌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이리 말하자,
사양은 공자를 보고,
君子聖人也!
군자는 성인이십니다!
이리 차탄을 하고 만다.
(※ 여담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주문왕 그리고 주공단은 모두 공자가 사모하는 이로서,
모두 예악의 근원으로 여겼다.
子曰:「甚矣吾衰也!久矣吾不復夢見周公。」
(論語)
“공자 왈, ‘심하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 되었구나, 내가 주공을 꿈에 다시 보지 못한 것이.’”
아아,
이 정도로 사모하여 꿈에도 모시는 이가 그대 당신들은 있음인가?
그렇기는커녕 당신 자신조차 버겁고,
어느 날 거울 앞에 비친 네가 미워지지나 않던가?
자고로 진리의 근원을 외부에 두고,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빌어 자신을 구하는 일은,
인류사에 아주 흔한 일이다.
공자를 위시한 유가가 저리 나가자,
묵가(墨家)는 주공보다 앞선 우(禹)를 앞세우며,
권위를 사며 제 사상을 폈다.
그러자, 이번엔 맹자는 우보다 앞선 요순(堯舜)을 끌어들여 앞세웠다.
나중에 도가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황제(黃帝)에 가탁(假託)하였다.
이를 가상설(加上說)이라 하는데,
인도 논리학 즉 인명학(因明學)의 정교량(正教量)에서도,
유사한 점을 발견해볼 수 있다.
도대체 이러한 것을 두고,
겸손하다 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교묘한 장치라 일러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진리의 발생생리학적 근본태라 하여야 하는지?)
아시는가?
人性本惡,學壞容易學好難라 하였음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즉,
악을 배우기는 쉬워도, 선을 배우기는 어려운 법이다.
온 천하에 악마구리들이 그득하다.
Don't Be Evil. You can make money without doing evil.
구글의 사업 모토인 이 글귀,
어느 날 슬그머니 싹 지워버렸다.
그들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장사를 하려면 악마파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아,
이제 청의(靑衣) 입고,
연신 창공(蒼空)에 푸른 연 날리던 시절은 가버린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양심 없는 놈들이라 비판한다.
하지만, 저리 솔직해졌으니, 이제 비로소 양심 되찾은 것 아니랴?
귀도 어둡고, 눈도 빛을 잃었다.
그러자 의지한다는 게,
다시 돌아온 저 사악한 구글의 품에 안겨,
아, 한걱정 덜었다며 휘파람을 부르고 있구나.
그래 이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마음을 앗긴 심순애가 되어,
비단 스란치마를 끌며 유리 낭하를 스르륵 거닌다.
사랑을 빼앗긴 이수일은 정신이 황폐해진다.
그날 이후 전귀(錢鬼)를 사모하여,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Don't Be Evil.
이제, 이 불온하기 짝이 없는 선전에 속지 말고,
그대 자신이 evil의 당체(當體)가 될 일이다.
가상설을 뒤집어엎고,혁명의 주체가 될 일이다.
사양, 공자, 모두는,
구글의 저 사악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본 모습을 어찌 대할는지?
여성오장설이라 하여,
본디 여자는 부처는커녕 마왕조차 될 수 없다 하였다.
(※ 女性五障說
大梵天王, 帝釋, 魔王, 轉輪聖王, 成佛
위 다섯이 될 수 없다는 설.)
하지만, 이게 나중엔 변성남자성불설(變成男子成佛說)을 거쳐,
여성성불설(女性成佛說)로까지 전변하고 만다.
그뿐인가,
유마경(維摩經)과 더불어 승만경은 출가하지 않은 재가자가 주인공이다.
게다가 승만경의 주인공은 승만이란 부인이다.
놀랍지 않은가?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공자가 그리 사모하던 주공이 나밖에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함이니 부처, 주공을 사모하지만 말고,
차라리 솔직하니, 그대 자신이 한껏 Evil해지고, 魔王이 될 일이다.
욕계 육천 타화자재천에 거하며,
마왕파순(魔王波旬)이 되어,
제 본성대로 evil해질 일이다.
헌데, 불경은 가르치길,
마왕은 천명을 다하고 지옥에 들어가고(入地獄) 난 후,
참회한 후 다시 출지옥(出地獄)하고 나서, 불법을 닦아 득도한다고 한다.
뻔한 스토리,
이것 가상설처럼 참으로 밋밋하니 재미없구나.
神不過是世界上的一般能源,人可以取爲己用
사탄교(撒旦教) 믿는 이들의 신념 가운데 하나인데,
신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 이용할,
일반적인 능원(能源) 즉 에너지원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내가 보기엔 이는 회개한 후 출지옥하여, 득도한다는 말과,
이야기 전개 양식이 같다고 생각한다.
신을 인간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취급한다면,
수고롭게 애초 이리 대상화할 일이 무엇인가?
출지옥할 일이면, 애초에 왜 입지옥해야 하는가?
전격 제 자신이 신이 될 노릇이고,지옥의 마왕이 될 일이다.
구차스럽게 신을 만들고, 그를 이용하거나,
지옥을 지어 스스로 갇히고 벗어나는 구질스런 짓을 왜 하는가?
(출처 : 圖片來自網絡)
그러니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네가 신이 되고 마왕 노릇을 할 일이다.
내 사내로서 계집 흉내를 낼 수도 없음인즉,
오늘은 한잔 술로 얼굴이나 불콰하니 달궈 볼거나?
자고로 주칠(朱漆)은 벽사(辟邪)에 으뜸이고,
단청은 신도들을 꾀고 윽박지르는 절집의 풍속이라,
천하 사내 계집 모두 불콰하니 붉은 놀음질로,
왼갖 잡귀(雜鬼), 역신(疫神), 마군(魔軍)을 모두 항복 받는
복마지술(伏魔之術)을 펴고,
이윽고 스스로 마왕파순이 될지라.
하지만,
신 또는 마왕 노릇도 구차한 짓이 아니랴?
나는 나다.
我是我 你是你
나는 나, 너는 너다.
이게 배타적, 불타협적 태도를 견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두는 각자가 인격적 주체임을 자각하는 순간, 문득,
산직(山直)이 외딴 집
눈먼 처녀가 되어,
봉우리마다 송홧가루 날리고,
꾀꼬리 해 길다 우는,
세상을 맞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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