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명변시비(明辨是非)

소요유 : 2023. 3. 18. 23:22


영상 하나를 보았다.

변희재는 박근혜 탄핵의 스모킹건(smoking gun)이었던 태블릿이 조작되었다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이야기를 풀기 전에 먼저 영상에서 진행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근데 아무튼 변희재의 주장에 모순은 없어요
그거는 내가 확신해 
모순이 없어 주장에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경황과 근거도 존재해 
그러나 그 정황과 근거가 사실이냐에 대해선 저도 모르겠습니다 뭐’

아아, 이 말을 듣자 나는 묵자에 나오는 다음 글귀를 소환하고 만다.

止:彼以此其然也,說是其然也;我以此其不然也,疑是其然也。
(墨子 經下)

‘저 사람은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으로써,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나는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써,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의심한다.’

변희재를 좋아하든 아니든 간에 그 판단에 있어,
그는 지금 여기저기 출연하여 실실 쪼개며 말을 하지만,
기실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가?
그가 감옥이 지내기 편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천하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감옥이 좋다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는 결연히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것이 아니랴?

그런데 저 진행자처럼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 아니 남의 일이 아니라 천하공사(天地公事)임이 아니랴?)
개중에 이젠 너무 떠드니까, 싫증이 난다든가 피로하다는 이도 나타난다.
그리고는 이젠 그만두라며 퍽이나 점잖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일쑤다.
내 겪어 보았지만, 이런 무리들이 막상 제게 일이 닥치면,
원통 절통하다고 제일 소란스럽게 아우성을 치더라.

세월호,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것은 네들 일이니 더는 시끄럽게 하지 말고 물러나거라 소리치는 이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 정도만 하여도 다행이라고 할까나?
외려 그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이며 조롱까지 하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진행자는 한마디로 그대 말이 수미일관되어 제법 논리적이나,
그 진위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일응 동조하는 양 싶다가도,
나는 더 이상 책임지기는 싫은즉,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며 슬쩍 발을 빼고 만다.

止:彼以此其然也,說是其然也;我以此其不然也,疑是其然也。

‘저 사람은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으로써,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나는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써,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의심한다.’

여기 문장 맨 앞에 나오는 止는 무엇인가?

止,以久也。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오래 지속한다는 말이다.
뉴튼 제1 법칙(Lex prima, the law of inertia) 즉 관성법칙은 무엇인가?

A body remains at rest, or in motion at a constant speed in a straight line, unless acted upon by a force.

힘이 가해져 물체의 상태가 변하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정지해 있거나 등속직선운동을 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A body remains at rest,
여기 rest가 바로 止에 當한다.
상태 지속, 항구성 이게 止다.

止,類以行之。說在同。
(※ 원본에 之는 人으로 되어 있음.)

類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몇몇 문장을 더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止類 즉 유를 확정해라.
同에 의해 설명된다.’

夫辯者,將以明是非之分,審治亂之紀,明同異之處,察名實之理,處利害,決嫌疑。焉摹略萬物之然,論求群言之比。以名舉實,以辭抒意,以說出故,以類取,以類予。有諸己不非諸人,無諸己不求諸人。
(小取)

‘ ... 類에 따라 취하고, 類에 따라 준다.
자신에게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거부되지 않고,
자기에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지 않는다.’

여기에선, 나와 타자 사이에 거래되는 시비 진위의 준거로 類를 들고 있다.
하니까 사물의 시비를 가리는 추리의 방법으로써 類 즉 유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小取에선 이에 대한 방법론으로 效, 辟, 侔, 援, 推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效者 為之法也 所效者所以為之法也 故中效 則是也 不中效 則非也。

‘효(效)는 법으로 삼는 것이다.
효가 되는 것은 법으로 삼은 그것이다.
그러므로 효에 맞으면 이것이고,
효에 맞지 않으면 이것이 아니다.’

묵가는 지금 추리는 止類 즉 유사성을 확정하는 것을 통해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변희재는 ‘나는 그해 겨울 저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통해,
마치 접동새가 피를 토하듯 절규하고 있다.

사람이라면, 저 묵가들이 기준으로 삼는 止類를 통해,
변희재 변설(辯說)의 진위를 알 수 있다.

아아, 그러나 말이다.
내가 그 추운 겨울 13차례나 광화문 광장에 나가,
촛불 들고 박근혜 탄핵을 외쳤다.
헌데 변희재 말로는 우리는 속았다는 것 아니냐?
과연 우리가 속았다면 얼마나 무참한 노릇이냐?
우리들을 속인 무리들은 지금 멀쩡하니 국권을 농단하고,
네 활갯짓을 하며 천지사방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랴?

止類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유사성, 동일성을 함께 나눈다.
하지만, 너와 나의 것이 다르다면 도대체 止類가 가능할 수 있음이더냐?
止類의 준거, 믿음의 나눔을 유린한 자가 있다면,
어찌 사람들과 함께 무리의 따뜻함을 공유할 수 있겠음인가?

無羞惡之心,非人也
無是非之心,非人也。

맹자의 준엄한 말씀이다.
도대체가 마땅치 않은 일에 수치를 느끼지 못한다든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라 하였음이다.
어찌 인간이 인간 아닌 자와 더불어 희비를 같이 나눌 수 있으랴?

한편, 사람들은 자신이 변희재의 감옥을 갔다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로지 자신만의 따뜻함만을 구하려 하고 있다.
따뜻한 안일.
이러고서야 어찌 함께 사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음이더냐?
더럽고 추저운 세상이다.

夫辯者,將以明是非之分,審治亂之紀,明同異之處,察名實之理,處利害,決嫌疑。

‘무릇 변론이란, 是非의 나누어짐을 밝힘으로써, 치란의 규율을 탐구하고,
同異를 밝힘으로써, 名實의 이치를 살피고, 
利害를 결정함으로써 의혹을 해소한다.’

是非를 분명히 가르지 않고,
同異를 밝히지 않으며,
利害를 옳게 처결하지 않는다면,
어찌 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명실의 도리가 거꾸러지고,
의혹이 들끓지 않을 수 있으랴?

是處非處

도리에 합당하고 아니 하고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
어찌 한 발자국인들 내디딜 수 있겠음이며,
名實이 부합되지 않고서야,
어찌 장부가 步武堂堂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랴?

明辨是非

여든 야든 모두 천하를 근심하기는커녕,
작년 그러께 먹다 옷깃에 흘린 김칫국물 가리기에 급급할 뿐이다.
천하 사람 역시 모두 조용하다.

추접스럽기 짝이 없는 세상이다.

知:傳受之,聞也;方不㢓,說也;身觀焉,親也。所以謂,名也;所謂,實也。名實耦,合也。志行,為也。
(經上)

‘전하여 받은 것이 문(聞)이고, 위치에 장애를 받지 않고 아는 것이 설(說)이고, 몸소 보는 것이 친(親)이다. ....’

知에는 聞, 說, 親이 있다 하였다.
묵가는 이중 친지(親知) 즉 직접경험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직접 보았던 것이라도 가령 귀신 등 헛것을 보고서는,
세상에 귀신이 있다 주장할 수도 있으니 마냥 믿을 수만도 없다.
여기서, 친지(親知)는 오관을 통한 감각적 경험지식이라 할 수 있다.
묵가는 이 친지는 오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귀신과 같은 헛된 것을 보고 진짜라 여기는 것은 왜 그런가?
묵가는 이런 따위의 경험은 지식이 아니고,
단지 착각하였기 때문이라며 친지에서 제척하였다.

친지가 이처럼 오류 불가능한 지식이라면,
설지(說知)는 이미 알고 있는 경험지식을 기초로,
새롭게 알게 되는 추론적인 지식이다.

변희재는 태블릿 조작설을 통해,
설지(說知)가 오염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묵가에 따르면 설지란 오류 불가능한 친지를 토대로,
추론을 통해 새롭게 추가되는 지식을 말한다.
하지만, 설지의 기초가 되는 친지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면,
의당 설지 역시 엉터리가 되고 만다.

경험을 통한 친지는 개개인에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 개인이 모든 지식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보다 확장적인 지식은 설지를 통해 보충 확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친지, 설지가 착오나 불순한 의도로 오염된다면,
인간 사이의 신뢰는 깨지고, 소통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변희재의 태블릿 사건 고발을 통해,
우리 모두 각자는 친지와 설지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지식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는 분자들에게는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바른 판단을 하여야 한다.

문득 불교 팔정도가 다시금 떠오른다.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며, 바르게 떠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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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23. 3. 18. 2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