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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적(大乘的)

소요유 : 2023. 3. 23. 20:56


대승적(大乘的)

대승(大乘)이 있으면 그 상대 말인 소승(小乘)도 있을 터.
대승불교(大乘佛教, mahāyāna buddhism)는 성불(成佛)하기 위해,
보살(菩薩) 수행을 한다.
이로써 무량 중생과 함께 성불을 꾀한다.
반면 소승불교(Hīnayāna buddhism)는 성문승(聲聞乘)이나 연각승(緣覺乘)처럼,
자신 홀로 수행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다.

여기 승(乘,yāna)은 수레, 차, 선박 등 타는 것을 지칭하며,
mahā는 크다, Hīna는 작다란 뜻을 갖는다.
수레가 크니 여럿이 함께 타고 갈 수 있으나,
작으면 혼자 타고 갈 수밖에.
그러나 소승이 스스로를 작고, 열등하다 누가 이르랴?
이 모두는 대승 측에서 그리 불렀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대승은 그 뜻이 거룩하고 아름다우나,
기실 소승의 청정해탈 수행법을 통해 자기완성을 해나가는 모습 역시 아름답지 않을 까닭이 없다.
외려 구심 진력하는 자기 극복 과정은 더 숭고하다 하겠다.
저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는 형편에 대승이랍시고,
오지랖 넓혀 不分彼此 너나들이 하다 엎어지고,
박힌 돌에 대갈통 깨지고 만다면,
이 또한 석가모니불 뵙기에 면목이 없을 것이다.

현 조계종 종단 안살림을 보아라.
술 처먹고, 도박하고, 골프 치고, 축첩도 불사하며,
가사장삼 휘날리며 천지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요승들이 좀 많은가 말이다.
제 몫을 다하지 않고 큰 수레에 편승하여,
밥만 축낸다면 이야말로 죽어 천년 측간 귀신이 되고 말리라. 

그럴 양이면 차라리 벽지불(辟支佛) 또는 독각(獨覺)이 되어,
네 자신의 숲속에 들어가 조촐하니 자기 앞섶을 가지런히 함만 못하다.

얼마 전 윤석열은 오장육부 다 꺼내어 왜구에게 갖다 바치며,
자신의 행위를 대승적 결단이라 한껏 치장하였다.

(출처 : wikileaks-kr)

이것만 보아도 대승이란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일하게도 무작정 대승은 좋은 것, 소승은 저열한 것이란 의식에 젖어 있다 보면,
정작 행동은 대승적이지 않으면서, 말만 빌려다 자신을 꾸미게 된다.
그러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면 그나마 다행인데,
대개 이러할 경우 외려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러워한다.

소승이 왜 나쁜가?
자기 분수를 지켜 청정심으로 불도를 닦는 이를,
그 누가 있어 비난할 수 있으랴?

무량한 낱낱의 중생이 각각 소승의 불도를 닦아 모두 해탈하면,
비로소 불국토가 완성된다.
공연히 대승 팔아먹으며 거짓 삶을 살 일이 아니다.
정녕 그대 당신들 부끄럽지도 않은가?

아무리 큰 수레를 타고 있으면 뭣하나?
해탈은 오로지 각자가 해결하여야 할 과제일 뿐이다.
결국 해탈이란 최종적으로 독립개별 사건이지, 연합 떼거리 사건이 아니다.

대승이라고 마냥 거룩한가?
주제넘게 자량도 아니 갖추고서는,
남을 돕겠다 나서는 것처럼 추한 것이 없다.
대개 넘쳐서 본래의 뜻을 거스르며,
큰 수레 타고, 큰 우산 밑에 숨어,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이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하고 있는가?

대승이 나타나면서,
외려 불도가 옅어졌다.
큰 수레 타고 있다며,
외려 떼거리로 분탕질을 치지 않던가?
게다가 말세임이라, 밀교가 나타나 부녀자를 유린하는 일도 스스럼없이 벌어졌다.

권세도천(權勢滔天)
권세 잡았다 천하를 유린하고,
큰 수레 타고 있다 으스대는 속물들.
말일장지(末日將至)라,
종말이 가까이 임박했음이다.
네들은 단단히 준비를 해둘 일이다.
아니 지은 죄가 무거운즉,
어줍지 않은 대비로 벌을 가릴 수 없다.

여기를 보라,
건물주가 세입자들 모두 몰아내며,
대승적 차원이라 잔뜩 치장하고 있지 않은가?

대승적이란 말을 빌어다 쓰는 이들의 문법은 이리 한 치도 틀림없이 같다.
다 당신들을 위하여 일을 꾸몄다 외치지만,
정작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내 이르노니,
대승을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을 조심하라.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입으론 꿀 바른 소리를 하고,
뱃구레엔 검을 숨겼기 십상이다.

자자, 그러함이니,
진리는 소승, 대승에 있지 않다.
다만, 그대 당신의 청정한 마음에 달렸을 뿐이다.

(출처 : 圖片來自網絡)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절이 옮겨 갈 수 있는가?”

이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라면,
조심하여야 한다.
스스로 점검하길 나는 혹시 노예의식에 잡혀있지 않은가?
이리 자문해보아야 한다.

나라면 절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도끼로 절간 기둥을 패고,
오함마로 불상을 부수고,
시줏돈만 탐내는 땡초들을 다 내쫓고.
다시 절을 세울 것이다.

나는 주인이다.
그런 고로 문득 부처가 된다.
부처를 의욕하지도 않았음에,
나의 행덕(行德)으로 어느 날 부처가 되는 것임이라.

이게 부처가 말씀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함의가 아닌가?
운문(雲門)의 우불살불(遇佛殺佛),봉조살조(逢祖殺祖)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단하천연(丹霞天然)은 그러하기에 소목불(燒木佛)이라,
목불을 쪼개어 불을 쬐었음이 아닌가?

내 노파심에서 한마디 보태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들을 필요도 없는 헛말이로되,
혹 얼척없는 촌놈이 곡해를 하고 괴한으로 변신할까봐 애써 풀어둔다.
단하천연이라야 목불을 뽀갤 수 있는 것,
핫바지저고리가 어찌 감히 목불아냐 진흙으로 만든 인형일지라도 훼할 수 있으랴.
이 말씀은 곧 그만한 위(位)에 오른 경지이기에 가한 것.
한즉 양아치가, 사마귀 주제에 어찌 흉내내어 수레에 대들랴?
제가 뱉은 말에 스스로 놀래 이사가기를 꾀하는 용렬한 자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이 아닌 바임이라,
그러하기에 제 말에 확신을 갖지 못하니 이사갈 궁리를 트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어떠한가?
내 단호히 말하거니와,
단하천연 한 다스가 떼거리로 달겨들어도,
땅에 떨어지는 동백꽃이듯 목아지를 똑똑 따버렸음이다.
이미. 

(丹霞寺內現代人刻的天然祖師像)
 
비겁하게 왜 이사를 가는가?
제가 싸놓은 똥이 그리도 구리고 무섭더란 말이냐?
나약한 겁쟁이.
엄동설한 눈 속에서,
아직도 헤진 갈옷을 입고, 떨고 있는 허재비가 그대를 보고 웃고 있지 않음인가?

머리 깎고 중이 되었는데,
어이하여 중놈이 절을 떠나는가?
중노릇 제대로 하려면,
도끼로 당집을 그대로 찍어 쓰러뜨려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절 하나씩을 뽀개버려야 한다.
절간에 기식하는 땡중들은,
하루에 열두 명씩 모가지를 싹둑 잘라버려,
개골창에 내다 버려야 한다.

서양의 니체 역시 신의 사망 선고를 내렸다.
   (신, 이성, ... 미신, 맹종, 추접한 텃새 근성, 촌놈 의식, 권세추종자, ...)
그 역시 부처에 다름 아니다.
노예를 죽이고,
주인이 된 이는 모두 부처란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때라야 천국의 문이 열려 하느님을 영접할 수 있음이며,
제석천(帝釋天)은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에서 지상으로 꽃비를 내릴 것임이라.

이때라야 주인이 된다.
연화좌(蓮花座) 주인 자리에 앉은
부처가 되는 것임이라.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대통도 물론이거니와, 대승도 없느니라,
다만 자기자신에게 귀의할 일이다.
(※ 참고 글 : ☞ 관음은 누구에게 참불하는가?)

장삼에게 이르는 관세음보살의 말씀

‘남에게 비느니 자신에게 빌어라.
사람은 부처께 빌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빌어야 하느니,
자신이 바로 부처인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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