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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연(自熾燃)

소요유 : 2023. 12. 10. 16:50


자치연(自熾燃)

그대 당신들,
불 타고 있는가?

是故,
阿難!當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云何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阿難!比丘觀內身精勤無懈,
憶念不忘,除世貪憂;觀外身、觀內外身,
精勤不懈,憶念不忘,除世貪憂。受、意、法觀,
亦復如是。是謂,阿難!自熾燃,熾燃於法,
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佛告阿難:「吾滅度後,能有修行此法者,
則為真我弟子第一學者。」
(佛說長阿含經卷第二)

“그런고로, 
아난이여! 
마땅히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할 뿐,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말아야 하느니.
마땅히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할 뿐,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르길 그럼 어찌,
자기를 등불로 하고, 법을 등불로 하며,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마땅히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아난이여, 비구는 몸 안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몸 밖과 몸 안팎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受、意、法을 관(觀)함도 역시 이와 같으니,
아난이여, 
또한 이와 같으니 이것을 이른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며 그 외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않는 것이요.
마땅히 자기에게 의지하며,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신다.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능히 이법을 수행하는 자는 곧 진실된 나의 제자이며,
제일 으뜸가는 배움에 (힘쓰는) 자가 되리라.」”

여기 나오는 이 부분을 보자.
當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
‘마땅히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할 뿐,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말아야 하느니.’
대개 이런 식으로 번역 통용되고 있다.
헌데 熾燃 이 글자는 등불이 아니다.
이 자의는 성하게 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기를 불태우고, 법(dharma) 에 의지하여 태우고, 다른 것에 의하지 말란 뜻이다.
그런즉 부처는 태우라 이른 것이리니,
그리 그렇게들 소신공양이니 자화장이니 하며,
불과 친하려 드는 것이런가?

과연 부처가 말하는 當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
熾燃이란 것이 자신을 그저 불에 태우라 하는 것이란 말인가?
自熾燃,熾燃於法하라 하였지만,
勿他熾燃이라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시다.

스스로 타고, 법에 의지하여 타라 하였음이다.
이 말씀 앞에 서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불 사르고, 무엇을 위해 그리 하라는 것인지?
부처의 말씀을 다시금 겸허히 헤아리게 된다.

자승이 불지른 요사채는 왜 일없이 태워졌는가?
듣건대 실인즉 그저 단순한 요사채가 아니라, 비전(碑殿)이라고 한다.
곁에는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가 있다.
비각(碑閣) 안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가 모두 분리된 채 모셔져 있다.
비전이 화재가 나면 국사비도 화마가 미칠 우려가 크다.
다행이 이번 방화에도 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 글(자화장)에서 소개하였듯,
분신을 한다 한들, 주변에 불이 번지지 않을 도리를 마련코 일을 꾸민다.
헌데 보물 488호 뻔히 지정된 문화재 옆 건물을 방화하였다면,
이는 실로 죄를 감당키 어려운 행위라 하겠다.

(출처 : 圖片來自網絡, 불에 타버린 비전 바로 왼편에 혜소국사비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힘과 에너지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힘은 크기와 방향을 가진 벡터량이지만,
에너지는 크기만 있을 뿐 방향이 없다.
이를 물리학에선 스칼라양이라 한다.

가령 댐 위에 저장된 물은 그 총량과 위치로써 에너지량이 결정된다. (M*G*H)
하지만 댐 안에 갇혀 있는 한 아무런 작용효과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 potetial energy인 것이다.
즉 잠재태로써 그냥 그렇게 덩그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 수로를 통해 물골을 내고 물의 흐름을 그리로 유도하고,
수차를 돌릴 때 연결된 발전기가 비로소 전기를 생산하며,
이게 송전선을 통해 각 수요처로 배분이 된다.
그 때, 전기청소기를 쓰면 청소가 되고,
세탁기를 돌리면 세탁이 되며, 
발동기를 돌리면 방아가 찧어진다.

이 구체적 동작의 크기 그리고 쓰임의 방향으로써 에너지는 소모내지는 전화(轉化)된다.
(W=F*S)

공기 중에 에너지가 퍼져나가며 밀(密), 소(疎)의 패턴을 만들어낼 터인데,
그것을 흉내 내어 레코드판에 새김으로서 허공중에 사라지고 마는 소리를 잡아 붙든 것이다.
레코드판에 새겨진 이랑과 고랑이 만드는 문양이란 실로 소리에너지의 패턴인 것인데,
이것에 철심이 밭갈 듯 지날 때 흔들리는 진동을 전기 에너지로 포착, 환원하여,
스피커를 때림으로서 원래의 소리를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자 함인가?
에너지 패턴은 의지, 욕망이란 벡터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레코드판의 골 패턴은 음악 소리, 그 아우성이 함장(含藏)된 것이다.
가뭄 끝에 논밭에 나가면 쩍쩍 갈라져 있다.
이것 고정된 흔적으로 남아 있음이나,
실인즉 흙입자들의 결속 강도, 건조 정도에 따라,
그리 그렇게 힘의 크기와 방향이 결정되어 가며 자취가 남은 것이다.

그 앞에 서면,
그 치열했던 갈등의 행적, 역사의 내막이 읽혀지지 않는가?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동일한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저 잿더미 앞에 서서,
그것을 소신공양이라 이르는 이도 있는 반면, 
소신자살이라 이르는 이도 있다.
나아가 현주건조물방화죄를 저질렀다 여기는 이도 있는 것이다.

덩그란히 불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과연 자승은 도를 완성하고 열반에 든 것인가?

道 ↠ 德       
도가에선 유가가 이 차서로,
세상이 본을 잃고 망가져가는 실상을 따라 그리고 있다고 비웃는다.
또는 
     道의 역행으로,
실천 현실 속에서 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게 한비자를 필두로 한 법가이다.

순행이든, 역행이든,
저 망망(茫茫) 무제(無際)로 멈춰서 있는 댐 위의 물들은,
때를 만나고, 인연이 익으면 전기가 되어,
세탁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방아도 찧는 구체적 실천의 몸짓으로 떤다.

나는 그 변화의 동력을 慾으로 본다.
權, 財, 色(名利情) 
이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에게선 삼자를 여의고 그 어떠한 행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소신도 부족하여 소신공양으로 미화하는 일은,
현실의 추동 원인 내용을 조용히 덮고, 급히 가리는 짓에 불과하다고 본다.
필시, 누군가에겐 그리 급한 사정이 있었을 터이다.

거꾸로 원인을 밝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저 force field line 力線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력선이나 전자기력선의 역학처럼,
인간의 내재된 욕망의 전개 방정식을 따를 뿐이다.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그 구체적 사실관계, 내용을 나는 아지 못한다.
가까이에 있지도 않고, 정보도 충분치 못하다.
하지만, 소신이란 사실 앞에서 일방적으로 공양이라 볼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분명한 것은 욕망 즉 權, 財, 色 이 삼자를 원인으로 한다는 것은 변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평소 자승은 權, 財, 色과 관련된 의혹도, 소문도 무성했다.
오죽하였으면, 일각에선 그를 두고 권승, 요승이라 하였겠음인가?
시비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불교계는 물론 정치권과 얽힌 사연도 많다.
그러함이니 그의 죽음과 관련된 판단은,
그저 간단히 소신공양이란 말로 덮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 하여 내가 호기심이 승하여 그 너머 것을 알려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사물의 이면에 숨은 역학적 동인을 간과하여서는,
악의 세력내지는 언론의 꼭두각시 놀음을 천년이 지나도 면키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을 따름이다.

阿難!當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

法(dharma, 진리)에 의지하여 너를 치열하게 산화시켜라!
부처는 아난에게 이르 가르치고 있음이다.

헌데, 그대 당신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음인가?

멀쩡한 비전(碑殿)을 태우고서도, 
소신을 공양이라 이르며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니더냐?
4명의 상좌들에게 2억씩 갹출하여 다시 지으라 이르고 있다.
그 돈은 모두 신도들의 시주금이 아니더냐?
재물이 중에게 그리 흔한 것이더냐?
돈이 넘쳐 전각을 태우고 다시 지으면 그뿐이란 말이더냐?

한편, 언론은 사실을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불타는 건물을 다투듯 비추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더냐?
왜 사실을 취재하여 널리 알리려 하고 있지 않은가?

공양(供養)이라고?
나는 이 말을 듣자 바로 화가 났다.
감히 공양을 능멸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법화경에서 三界가 火宅이라 이르고 있다.
(※ 참고 글 : ☞ 화택유(火宅喩))

佛告舍利弗:「善哉,善哉!如汝所言。舍利弗!如來亦復如是,則為一切世間之父。於諸怖畏、衰惱、憂患、無明闇蔽,永盡無餘,而悉成就無量知見、力、無所畏,有大神力及智慧力,具足方便、智慧波羅蜜,大慈大悲,常無懈惓,恒求善事,利益一切,而生三界朽故火宅,為度眾生生老病死、憂悲、苦惱、愚癡、闇蔽、三毒之火,教化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見諸眾生為生老病死、憂悲苦惱之所燒煮,亦以五欲財利故,受種種苦;又以貪著追求故,現受眾苦,後受地獄、畜生、餓鬼之苦;若生天上,及在人間,貧窮[1]困苦、愛別離苦、[2]怨憎會苦,如是等種種諸苦。眾生沒在其中,歡喜遊戲,不覺不知、不驚不怖,亦不生厭,不求解脫。於此三界火宅東西馳走,雖遭大苦,不以為患。
(妙法蓮華經卷第二)

‘....
갖은 고(苦)를 겪으면서도,
三界火宅 속에서 동으로 서로 치달으며,
큰 고통을 만나지만, 이를 환난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정작 화택에 든 중생들이,
當自熾燃,熾燃於法
법에 의지하여 불도를 닦지는 못하고,
욕해(慾海)에 거푸 자맥질하며,
權, 財, 色을 찾으려,
질러질러 연신 탐심을 불태우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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