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레시피와 본질

소요유 : 2024. 8. 16. 12:49


어떤 이가 하나 있어,
이런 주장을 펴더라.

‘마크 저커버그가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취득하고 페이스북 창업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자격증 미소지자, 중퇴자 등을 우대하는 사회라야,
작금의 망국적 비운을 피할 수 있다라며 기염을 토하더라.

평소 기지가 뛰어나 주위를 놀라게 하는 이지만,
대개 10개 중 반, 또는 반의 반 정도가,
현실 정합성이 있을 뿐이다.

번뜩이는 기지, 골계, 풍자.
이것 아무나 발휘하는 특질이 아니다.
하지만, 일시 주목을 끌어 주위를 놀라게 할 뿐,
결국은 한바탕 허무맹랑한 언설로 끝나고 만다.

이런 이는 차라리 만담가나 연예계로 진출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한바탕 웃고 즐기면 그뿐,
그다음 일은 책임질 일도, 
누가 책임을 묻지도 않을 터이니까.

하여간 자격증 미취득자 우대 운운하는 말을 듣자,
나는 문득 짐 켈러(Jim Keller)가 생각났다.

반도체 설계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그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 NVIDIA에 대항한 칩 설계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엔비디아와 같이 HDM을 사용하지 않고,
고효율, 저가의 칩을 지향하고 있다.

그의 핵심적인 지적은
recipe and understanding
이 양자의 차이다.

https://www.youtube.com/embed/1CSeY10zbqo

내가 어느 날 인연 따라 어떤 이에게,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속성으로 가르친 적이 있다.
기본 원리를 먼저 일러주고 구체적 실천 기술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당장 기술을 부려 그림을 그릴 수 있게만 지도해달라고 하더라.
나는 이 사람의 부탁을 접하자,
순간 이 사람의 지적 수준을 단박에 파악해버리고 만다.

짐 켈러가 말한 레시피만 알고 싶다는 말이다.
대개 머리가 미련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이런 경로를 따른다.
학교 다닐 때,
문제 풀이에만 일로매진하는 학동들이 있지.
대개 열등한 이들에게 많이 목격된다.
역시 레시피族이라 할 밖에.

이치, 본질은 파악하기 어려우니까,
일단 급한 대로 문제 풀이로 때우려는 것이다.
어쨌건 거긴 문제에 따른 답이 반드시 따르니까,
한결 편하고, 마음이 놓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수많은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레시피만 달달 외운 자들은 당장 가지 쳐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다.

하지만 원리를 파악한 이는 천변만변하는 현실에,
적응적(adaptive)으로 나아가 창의적(creative)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다.

본질을 꿰게 되면,
현상이 어떻게 변해 전개해가든,
주체적으로 adaptive, creative하게 대응할 수 있다.

주역만 하여도 64괘로 삼라만상을 추상화시켜,
현상 세계를 능동적으로 해석해나가는 것이 아니랴?

짐 켈러는 recipe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understanding을 강조한다.
가령 빵 레시피만 외운 사람이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요리에 대한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라면,
비록 오믈렛을 한 번도 만들어 보지 못하였다 하여도,
이에 능동적, 창조적, adaptive하게 도전할 수 있다.

위 논자는 자격증이 곧 레시피와 같음을 지적하는 게 아니랴?
하지만, 중도에 자격증 따다가 만 경우,
그나마 레시피 하나조차 알지 못하는 얼치기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긴 한다.
기왕에 자격증에 도전하였다면 따두는 것이 중도 포기하는 것보단 나을 수 있다.

다만 자격증, 레시피의 한계를 깊이 깨닫고,
가는 길을 꺾고 새로운 길로 고쳐잡는다면 이는 별개라 하겠지만.

하지만, 쥐뿔도 없는 주제에,
레시피, 자격증 하나도 없는 자들이,
저이의 말 듣고 기고만장한다면,
이 또한 병폐라 할 밖에.

끝으로 그렇다면 과연 본질은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마저 일으키지 않으면,
이 또한 본질은 있다는 레시피에 안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아, 그러함이니,
불교의 살불살조殺佛殺祖하는 전통은,
언제나 빛난다 할 밖에.

나의 묵은 글이지만,
재미있는 글 하나를 이리 남겨 두는즉,
이 문제를 마저 생각해 볼 일이다.

所謂善人,人皆敬之,天道佑之,福祿隨之,眾邪遠之,神靈衛之;所作必成,神仙可冀。欲求天仙者,當立一千三百善;欲求地仙者,當立三百善。

“소위 착한 이를 사람들은 모두 존경한다.
하늘도 그를 도우니 복록이 그를 따르며,
뭇 사악함도 그를 멀리 피해 달아난다.
신령이 그를 보위하며, 하는 일마다 이룬다.

신선을 가히 바랄 수 있는데,
하늘의 신선이 되려면 마땅히 일천 삼백 가지 선을 행하고,
땅의 신선이 되려면 마땅히 삼백 가지 선을 행하여야 한다.”

나는 사실 이리 양(量)을 헤아리며 재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한다.
일천 삼백이니, 삼백이니 이리 선행 가짓수를 따지게 되면,
사람들은 선행 그 자체가 아니라 목표 숫자를 채우느라 본질을 잊어버리고 만다.
마치 아이들이 봉사활동한 횟수로 가점을 더하는 제도하에서,
정작 봉사가 아니라 점수따기에 집중하게 되듯.

본질을 찾는 과정은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쉬이 양적 대상에 매이게 된다.
물적 세계는 분명 양적 계량 평가가 유효하나,
정신적 세계는 양적 계량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애매함이 있다.
이 때문에 양적 성적에 이끌리게 되면,
본질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 안주하게 된다.

그런데 묻거니와 과연 본질이란 것이 별도로 있기나 있는가?
혹자는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 그 자체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기 한다.

차론(此論)은 이에 멈추거니와,
나는 다만 화자가 말한 일천 삼백과 삼백이란 대비에 흥미를 느낀다.
하늘 신선이 되려면 땅의 신선에 비해 무려 천을 더 보태야 한다.
이것은 그저 악을 쓴다고 이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차원이 다른 경지를 개척하여야 한다.
그게 무엇인가?

한(漢)나라에 종리(鍾離)라는 이가 있었는데 철을 금으로 바꾸는 연단법에 능했다.
해서 과시 궁한 사람들을 구제할 만하였다.
이 기술을 여동빈(呂洞賓)에게 전하였는데,
여동빈이 이리 여쭈었다.

“금으로 바뀐 후에 다시 철로 바뀌진 않습니까?”

이에 종리가 말한다.

“오백년 이후엔 다시 원래의 철로 되돌아온다.”

여동빈이 말한다.

“그렇다면 오백년 이후엔 사람을 해칠 수도 있겠군요.
저는 이런 짓을 저지르기 원치 않습니다.”

종리가 여동빈에게 연단법을 가르치려 함은 그의 마음보를 시험하고자 함에 다름 아니다.
이제 여동빈이 선량한 이임을 알 수 있다.
그러자 그에게 이리 말하였다.

“선도를 닦으려면 삼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데,
너는 이미 원만히 이 수준을 뛰어 넘었느니라.“

이제 일천 삼백이니, 삼백이니, 혹은 삼천이니 하는 숫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 이르는 말씀의 경계가 바로 짚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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