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The Great Refusal

소요유 : 2025. 9. 30. 12:1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이란 책을 난 대학교 1학년 때 읽었어.
이게 문득 생각나는 것 있지?

어떤 자 하나 있어, 그의 오랜 지인의 환갑을 맞아,
청하지도 않았는데 앞장서서 모연문(募緣文)이랄까,
축연계적 발기문 (祝宴契蹟 發起文)이랄까, 회갑연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며,
위원들 명단을 임의로 발표하며 호들갑을 떨더라.
이게 물론 반 농담, 반 진심인 것을 어찌 모르랴?

하지만 요즘 세상에 회갑연을 열겠다며 방방 뛰노는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어.
슬그머니 심술이 나더란 말이야.
상대는 평생 인터뷰만을 업으로 삼은 이였는데,
내 역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글 하나를 부려보았어.

요즘 누가 촌스럽게 환갑잔치하냐?
60이면 새파란 젊은이 축에 속한다.
하여간 장바닥 여리꾼처럼 이 화상 바람 잡는 데는 소질이 있다니까?

그러지 말고 천하의 인터뷰어인 그는 트럼프를 인터뷰이로 데려다,
환갑 기념 인터뷰를 진행할 일이다.
男兒要當死於邊野,以馬革裹屍還葬耳 (後漢書 馬援傳)
대저 장부는 변방에서 죽어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낸다 하였음이다.

평생 인터뷰어로 살아왔다면,
죽으나 사나 인터뷰로 삶을 장식하여야 하지 않겠음인가 말이다.
작금에 천하 만민을 괴롭히는 천불한당 트럼프야말로 시의적절한 상대라 하겠다.
그대는 표나고 쉬운 일로 생색내지 말고,
견마지로를 다하여 트럼프와 인터뷰를 성사시킬 일이다.
삼천리에 바람개비 달아 삼억리로 개조하고 迷國으로 날아가,
트럼프 녀석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 한국으로 끌고 와 그 앞에 대령할 일이다.
(※ 이 화상은 삼천리 자전거를 즐겨 탄다.)

고작 60에 벌써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게 하려 함인가?
그대는 사물을 진취적으로 판단하고,
남 눈치 보지 말고 거침없이 방달(放達)하니 전개시켜야 한다.

여기 조조의 龜雖壽란 시 한 토막을 소개하노니,
이로써, 그대의 안일함을 되우 나무라며 깨우침을 촉구하노라.

神龜雖壽,猶有竟時。
騰蛇乘霧,終為土灰。(騰 一作:螣)
老驥伏櫪,志在千里。
烈士暮年,壯心不已。
盈縮之期,不但在天;
養怡之福,可得永年。
幸甚至哉,歌以詠志。

'신선한 거북이 비록 장수하지만, 그 생명도 다하는 때가 있네.
하늘을 나는 등사(안개를 유영하는 뱀)도 안개를 타고 올라가도, 결국은 흙과 재가 되리.
늙은 천리마가 마구간에 누워있어도, 뜻은 천 리 밖에 두네.
의기로운 사람이 늙은 노년에도, 웅대한 뜻은 줄지 않는다네.
.....'

환갑잔치 치르면,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손뼉 치며 늙은 것을 공인하는 꼴이니,
그다음 날부터 주인공은 부쩍 늙고, 무기력해지고 말지.
그러함이니 이는 그를 축하해주는 게 아니라,
정작은 의기를 손상시키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라 권청하는 일이 되노라.
사려 깊은 이라면 이런 짓 함부로 벌이지 않으리라.

하여간 저 화상 주책없이 달랑달랑 촐싹거리는 데는 당할 자가 없다니까.
쯧쯧.

온 세상에 마르쿠제가 말한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 일색이야.
이 책에 나오는 The Great Refusal을 통한 급진적 저항 의식이 없어.
그러니 해방을 꿈꾸지 못하고 현실에 주박되어 있지.
마치 설사 똥 싸고 그 위에 퍼질러 앉아 헤엄치는 꼴이라 할 밖에.
명색이 평론가가 이 지경이니, 나머지는 또 어떠하랴?

The Great Refusal

60년 전 이야기지만, 벌써 자본주의의 모순과 편안함에 순치된 인간을 고발하였지.
Repressive Tolerance임이라,
자본지배층은 억압된 관용으로 교묘히 대중을 타락시키고 식물화 시켰지.
기본적인 필요가 아니라 허위 필요를 주입 강제하지.
개인 역시 그 허위 필요를 당연시 하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 인생을 갈아 넣지.

앞선 글에서도 지적하였듯, 경쟁하듯 sns에 자신을 creator,
그도 부족하여 digital creator라 선전하기 바쁘지.
(※ 참고 글 : ☞ digital creator 유감)
아니 왜 모두가 digital 인간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analog 인간이 되면 아니 되는가?
현대 사회는 digital 기술로 거대하니 구축되어 있는 바, 그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이것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삶의 기본적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어.
하지만 자신의 의식마저 여기 계박될 이유는 없어,
장자에 나오는 붕새처럼 구만리 장천을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는 없는가?
난 앞서도 말하였지만, 이 경지는 결코 digital로는 도달할 수 없고,
analog라야 유류(有漏)없이 나아갈 수 있어.

환갑연 역시 마찬가지야.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란 말이 있듯이,
칠십까지 사는 것도 힘든 세상에선 혹 회갑연이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100세 시대를 노래하는 세상에,
왜 회갑연에 집착을 한단 말인가?

The Great Refusal
거대한 저항이 아니라, 회갑연을 거부하는 것은 그저 작은 저항, 사소한 일탈에 불과하지 않아?
이 정도도 저항할 수 없단 말인가?

현대 문명에 익숙하다 보니,
기술 이데올로기까지 생겨나고 있어.
이 기술의 편리성에 익숙해지다 이젠 기술의 필연성에 복속되고,
비판과 저항이 실종되어 버리고 말았어.
기술 그 자체뿐이 아니고 이젠 문화, 예술, 인간의 정신 영역까지,
기술 만능, 만물 상품화된 세상에 젖어 있지.

비근한 예이지만,
가끔 내 블로그에 이웃 맺기를 하니,
자신의 블로그로 놀러 와 이웃 맺기를 해달는 자가 나타나곤 하지.
아니 도대체 이웃맺기가 뭣이 그리 중요하기에,
어린아이들 딱지 모으듯 그리 해야 하는가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허위의 필요일 뿐인 것을.
여기에 한눈팔고, 제 영혼을 저당잡히고 말지 않아?
저 가여운 중생이란 도대체가.

그래 나는 정작 당사자는 태연한데,
객이 나타나 회갑연 열겠다고 게거품을 물고, 깨춤을 추는 꼬락서니를 보고는,
남의 회갑연을 상품화하고, 의식화하는,
저 허위의 인간 군상에 적이 욕지기가 일고 만 것이야.
 
비판 정신도 사라지고, 주체성을 잃고 말았어.
있는 세계에 안주하고, 묵은 습속에 복속하고 마는,
저 안일함이란 도대체가 얼마나 욕된가?
마르쿠제는 이를 일차원적 인간이라 지칭했어.

개나 소나 입만 열면 떠드는,
대박, 힐링, 워라밸(Work-Life Balance) 이런 따위의 말을 들으면 욕지기가 일어,
가령 워라밸만 하여도 얼핏 표면적으로는 진보적 개념으로 보이지.
인간해방을 노래하는 멋진 말이라며, 대중은 열심히 소비하지.
에코 챔버(Echo Chamber)에 갇혀,
서로 주고받으며, 의식을 강요하며 소외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
이 안에 갇혀 있으면 도전받지 않는다는 믿음에 서로를 결속하고,
외부는 모두 적으로 치부하고, 악의와 적개심을 드러내기 일쑤지.

광장에 나아가, 미국 국기도 모자라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누런 이빨을 드러내는 저 허름한 인간 군상들을 봐봐.
성채에 갇혀 적개심을 드러내는 저 상처 난 짐승들이란 도대체가.

저런 말들은 거죽으로는 그럴싸하니 착한 인간을 지향하는 양 싶지만,
내면적으로는 억압된 의식의 안일함을, 그리고 저항과 도전의 포기 그 반영이기도 하지.
왜 모든 사람이 피리 부는 사람을 따라가는 소년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나일 뿐이야.
도전받지 않는 믿음이란 남이 만든 달팽이 껍질 속으로 도피할 일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비판하고 저항하며,
이 거대한 성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는 인간이 되어야 해.

The Great Refusal

저 환영을 깨고,
저 정치한 거미줄을 찢고,
이게 진정 내가 바라는 욕구인가 되물어야 해,
남이 만들어낸 성채, 시스템, 알고리즘에 갇혀,
날개를 파닥이는 자신의 본 모습을 직시해야 해.
정치, 사회적 구속을 풀고,
문화, 철학적, 너 자신의 본능으로부터 솟구치는 혁명을 일으켜야 해.
이것이야말로 creator의 삶이지.
그런즉 굳이 앞에다 digital이란 허위의 너울을 둘러쓸 이유도 없어.

요즘 탕핑(躺平) 과 FIRE 운동 이 널리 알려져 있어.
전자는 기존 질서를 무의미하다고 느껴,
누워 스스로를 사회에서 철수시켜 버리는 것이야.
반면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는,
기존 질서의 규칙을 이용하여,
적극적, 전략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말이야.
이것들이 하나의 도그마, 운동이 되는 순간,
질서가 되고, 고인 물이 되고 말지.
다시 대거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어.

왜냐?

我只是我!
나는 나이니까.

어디에 구속되지 않는 특별한 나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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