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수사불패(雖死不敗)

소요유 : 2009. 4. 5. 15:26


어제,
어떤 분의 농장을 방문했다.
파주변 민통선 안을 들어가자니,
입구에 장병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수사불패(雖死不敗)라는 표어가 새겨져 있는 것이 얼핏 눈에 들어온다.

이게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어귀(語句)가 아닌즉,
누군가 한문이라든가 중국어에 밝은 이가,
이리 적도록 한 양 싶기도 한데,
덧붙여 쓰여진 임전무퇴(臨戰無退)와는 어찌 다른가?

가만히 새겨본다.

임전무퇴(臨戰無退)란,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다.”란 뜻이니,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익히 배워왔지 않은가?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 (世俗五戒)를 보면,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가운데 임전무퇴가 나온다.

내가 원광에 대하여는 깊이 모르겠으나,
불교 승려이면서 忠, 孝를 앞세운 것 따위를 보면 새록새록 의문이 생긴다.
세속오계는 말 그대로 세속적일 수밖에 없다할지라도,
종교적인 가르침이라기보다 다분히 정치적 구호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승려가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을 말하고 있음이니,
당대의 시대적 과제 상황에 부합하여 정치권력을 십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나는 그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혹여 정치승려쯤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부쩍 든다.
또는 한나라당 식 표현을 빌자면 실용종교를 외치며,
실인즉 종교를 왜곡하고 나대는 인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대운하 앞장 세우면서,
한편으론 녹색성장, 생태云云 하는 하수상한 문법을,
나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따위 병문(兵門)의 가언(家言)을 앞세운
원광이란 이의 뜻말과 함께 시대를 초월하여 동시대에서 마주치자, 어찔어찔 헛갈리며 듣는다.
(※ 참고 글 : 2조원 날리고 나라망신?
초록동색이라는 '신동아' 기사조차 경인운하를 '나라망신'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가 승려임을 고려할 때,
살생유택(殺生有擇)은 금살생(禁殺生)을 고민한 결과 나온 가르침이라기보다,
정치적 선택내지는 야합하고자 하는 뜻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살생계(殺生戒)는 보살십계(菩薩十戒) 중에서도 으뜸 계율인데,
아무리 좋게 보아 세속이란 이름을 빌어 앞장 세운 현실적응형 변용이라 할지라도,
살생유택(殺生有擇)이란 필경 세속적인 권력과 모종의 거래가 전제되지 않으면,
쉽게 상상할 수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화랑을 불교란 정신적 지주로 묶고, 한편으로는 전사(戰士)로 조직, 동원하기 위해,
필경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이끌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살생유택(殺生有擇)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살생계(殺生戒)와는 완연 그 궤가 다르다.
세상에 살생무택(殺生無擇)하는 이가 어디 흔한가?

불살생(不殺生)의 건너편 강안(江岸)에 피차 나뉘어 갈라선,
자리에서라야 비로서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하니 이름이 아무리 ‘세속’오계라 한들 승려 입장에선 불살생을 말하고 있지 않은 한,
살생유택이란 말을 빌어서는 정녕코 자신의 위치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가 살던 때부터 흘러 1400년 지난,
지금도 불교의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이 받는 오계(五戒)에도 으뜸 계율은
엄연히 불살생(不殺生)이다.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 - 육식-채식-소식-단식-죽음-평화)

그러하기에 나는 생각한다.
세속오계는 흔히 말하는 화랑의 유불선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이 아니고,
유가(儒家)와 병가(兵家)의 사상들이 편의에 따른 평면적인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통해
동원되었고, 그저 당대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서 급조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수사불패(雖死不敗)란 또 어떠한가?
“비록 죽을지언정 패하지 않겠다.”
혹은 수사불퇴(雖死不退)라 하여,
“비록 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겠다.”해도 좋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게 개별 인간 단위 수준에서, 꾀하는 제 일에 임하는 자세라면,
그게 무엇이건 간에 내가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가령 운동선수가 경기에 나서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승리를 위해 이를 악물고 기량을 발휘했다고 할 때,
이를 '수사불패(雖死不敗)' 이리 표현했다면 그러려니 하겠다.
시비를 떠나 그것은 그에 국한된 문제이니 제삼자가 나설 까닭이 없다.

하지만,
이 구호가 전사(戰士)들에게 교육되고 훈도되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하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국가를 지켜야 된다.
그러하니 절대 패하거나 물러서지 말고 목숨을 던져라.”

이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하다면,
그가 바친 신명(身命)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란 물음이 따라야 한다.
생명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는가?
국가를 위해 개인의 목숨이 희생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물음을 나는 던지고 있음이다.

그럼 전쟁은 누가 벌이는가?
흉악한 외부의 적(敵)이 우리를 까닭 없이 공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정치 권력자들이 제 욕심을 위해 힘없는 국민들을 동원하는 경우는 왜 아니 없겠는가?
오히려 작금의 국제 전쟁은 이런 경우가 대다수임을
이젠 조금만 정신차린 사람이라면 다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 때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서,
'수사불패(雖死不敗)' 이런 말처럼 그럴 듯한 게 어디에 있겠는가?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해야 해."

얼마나 피가 절절 끓는 거룩한 말인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한다는 말은 사뭇 고귀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와서는 국가가 과연 나와 우리를 위한 공(公)인가?
하는 의문이 나무 좀벌레가 쏠아놓는 가루처럼 새록새록 쌓이고 있질 않는가?

너무나 덕지덕지 분식(粉飾)된 추상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성거리고 있는 ‘국가’란 말은 허깨비처럼
모종의 매트릭스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한 연 기속에서
제 필요 따라 잠출(潛出)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위정자 대부분들은 병역을 기피하거나 면제자들이고,
역(役)을 부담하는 것은 가여운 서민들인 현실임에랴.
이러함에도 이 말이 거룩한가?
아니 무심코 이런 분위기를 유발함은 교묘한 세뇌의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요즘은 한발 더 나아가 저들이 부자들 세금 깎아주기 연일 바쁘다.
모름지기 부귀(富貴)가 빈천(貧賤)을 모욕하고 있는 현실은
누천년을 지나도 여전한 것이다.
(※ 참고 글 : ☞ 2008/06/27 - [소요유] - 富와 貴)

그러함에도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은 힘없는 국민들이다.
국가란 이름을 들어,
수사불패(雖死不敗) 하라고 권유함이,

“너는 나가서 죽어, 뒷전에 남은 우리는 살 테니.”

누군가에 의해 이런 뜻으로 독해된다면,
차마 얼마나 위험한 노릇인가?

수사불패(雖死不敗)를 외친다할 때,
먼저 이의 모범을 보여야 할 이들은,
묵묵히 그 외침을 듣는 자가 아니라,
목울대 붉히며 그 외침을 내는 자가 되어야 함이니,
이 때라야 가히 수사불패(雖死不敗)가 명실(名實)을 함께 얻어,
천하에 정명(正名)이 제대로 서리라.
(※ 참고 글 : ☞ 2008/05/16 - [소요유] - 광인현상(狂人現象) - 광우병(狂牛病)과 마녀(魔女)사냥)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못 속 고기를 잘 보는 자  (0) 2009.04.12
궁서(窮鼠)  (2) 2009.04.10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  (3) 2009.04.08
칼살판  (2) 2009.04.03
집게 든 공원직원  (3) 2009.04.03
공덕비  (2) 2009.04.01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09. 4. 5. 1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