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얼마 전 눈이 왔을 때,
어떤 이로부터 문득 내 생각이 난다며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올가을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더덕 밭에 내려앉아 쉬던 참새가 날아오르는 사품에,
후드득 이슬이 떨어지듯(滴滴露珠),
가슴 속에 그리움, 서러움이 또르르 구른다.
아마도 첫눈이 아닐까 싶은데,
첫눈에 기대하지 않은 이로부터 전해 받은 안부 메일은,
마치 첫사랑의 그것처럼 엷은 흥분을 일으키고 있다.
미열처럼 은은하고,
솜사탕처럼 달콤한,
첫사랑의 추억이 뇌리를 가만히 번져간다.
뇌리(腦裏)라니?
추억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로되,
나는 지금 머리로 하고 있는가?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샘, 그 가슴조차 메마르고 있음인가?
늙음은 그래서 도리 없이 안타까우리 만큼 조금씩 누추해진다.
오늘 눈이 난분분 허공중에 흩날린다.
나로서는 올해 처음 맞는 눈이다.
밭두렁에 구멍이 두 개 뚫렸다.
어제부터 밭에 관정을 파기 시작했는데,
여기 현무암 지질층 밑을 향해 금강석 비트는 휘돌아 나아간다.
그 소리가 내겐 마치 천만년 숨겨 감춰진 속살을 헤집고
지모(地母)의 젖가슴을 쥐어짜는 양 아연 앙칼지기도 하고나.
옹골찬 변강쇠 놈 하나가,
나사좃을 돌려 지모를 능욕하고 있지나 않은가?
내가 군대 있을 때,
우물을 팠던 기억이 있다.
나는 당시 졸병이라 그저 잔심부름이나 하였지만,
날랜 고참병 두엇은 커다란 흄관을 타고 건너면서
능숙하게도 일을 해내었다.
밑으로 내려가서는 암반을 곡괭이로 찍고,
해머로 때리면서 가까스로 부서진 석편들을 삽으로 거두어서는,
도르래를 이용하여 위로 올려 보냈었다.
이때만 하여도 그 정경은 마치 기도처럼 정성이 깃들고,
간절한 소망이 지펴 올려진 경건한 의식이 치러지고 있다는 셈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적당할 만큼의 돈과 필요 따위가
서로 거래되는 욕망의 교환시장처럼 지극히 타산적이며 드라이하다.
나 또한 그 시장 속에서,
이악스런 장돌뱅이 하나가 되어,
미처,
이 순결한 눈바람을 맞이할 틈도 없었고나.
오늘 하루.
거센 눈발이 언덕위로 내리 꽂힌다.
나는 밭 맨 위 언덕에 올라 바지 지퍼를 내리고,
강가를 향해 대차게 오줌발을 날린다.
하릴없는 장돌뱅이 하나가
이리 오늘 하루를 이리 능욕하고 만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봉제사(奉祭祀)!
봉선(封禪)은 황제나 하는 것,
그 위선에 찬 봉선이 아니라,
나는 대신 청정신(淸淨身),
내 분신들을 내갈겨,
지모를 욕보인다.
언덕위엔
통곡처럼
눈발이 날린다.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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