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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만권서(讀萬卷書)

소요유 : 2017. 7. 18. 08:14


육조(六祖) 혜능(慧能)은 일자무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이리 배울 형편이 아니 되니, 글을 읽을 줄 몰랐다.

혜능이 여인숙에다 땔나무를 팔은 후, 

사람 하나가 있어 그에게 금강경을 읽어 달라 청하였다.

듣자마자 마음에 큰 깨달음이 있었다.

하여 오조(五祖)인 홍인(弘忍)을 배알하러 갔다.

홍인은 그의 그릇을 간파하고는 일단 주방 일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8개월 동안 있었지만, 다만 방아 찧고, 나무 하는 일만 하였다.

어느 날 법회를 듣게 되었는데,

홍인은 법을 전하고자 각자 게송을 지어 바치라 하였다.


신수(神秀)란 상좌(上座)가 게송을 지어 바쳤다.

홍인이 그 게를 보니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하여 다시 게를 바치라 일렀다.

혜능은 이를 듣고는 게송 하나를 외웠다.

다른 이에게 이를 적어 벽에 걸어 달라 하였다.


神秀偈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慧能偈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혜능의 게송이 걸리자 모든 사람은 놀랐다.


나는 이 게송을 대학교 때 교실에 늦게까지 남아 있다,

우연히 남의 모임에 끼어들었다가 접했는데,

역시나 한참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인연으로 내처 법보단경까지 읽게 되었다.

홍인은 이를 본 후 아직 깨우치지 못하였다 짐짓 평하였다.

하지만 남몰래 야반삼경에 혜능에게 금강경을 전하였다.

거기 應無所住而生其心에 이르자 크게 깨우침을 얻었다.


며칠 전 여기 블로그에 들어와 댓글을 단 이가 하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작 만화책 정도를 읽었을 뿐이라며,

자신의 공부가 짧음을 외려 자랑하였다.

책 하나 읽지 않고서도 큰 도를 일구었으니 얼마나 장하랴?

이런 심사였으리라.


하자 나는 이내 혜능을 떠올렸었다.


깨달음에 이르는데 글자를 알고 모르고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

혜능은 글을 읽을 줄 모르면서도 큰 깨우침을 얻었다.

人有南北,佛性豈有南北?

혜능의 이 말처럼,

사람에겐 남북의 출신이 다를 수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의 다름이 있으랴?


그런데 그의 글을 보자하니 그는 결코 혜능이 아니었다.

제 감옥에 스스로 갇힌 수인(囚人) 하나를 보았을 뿐이다.

마치 열역학을 배우지도 못한 이가, 

영구기관을 발명하였다고 떠드는 날도깨비 환영(幻影)을 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사람을 예전에도 접한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자연농법 유감(遺憾) 2)


성철 스님은 당신 자신은 수 천권 책을 읽었으면서,

남들에겐 책을 읽지 말라 일렀다.

그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였는데,

책을 많이 읽으면 아닌 게 아니라,

외려 깨달음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만약 성철 스님이 책을 아예 읽지 못한 일자무식이라면,

과연 도를 이룰 수 있었을까?

혜능이 일자무식이라는데,

만약 그가 유식한 이라도 과연 깨달음에 이룰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가 남긴 법보단경(法寶壇經)이란 남에게 구술시킨 것으로 보기엔, 

너무도 아름답고, 훌륭하다.

필경 그도 후에 글자를 배우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그리 분량이 많은 것이 아니므로 일반인도 읽어볼 만하다.

선(禪)의 진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六祖慧能의 돈오(頓悟)를 믿지만,

이게 그저 맹탕인 상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자량(資糧) 즉 마치 땔나무가 없다면,

아무리 번갯불이 퍼부어도 결코 불이 붙을 수 없다고 본다.

아니,

깨달음이란 땔나무의 다과(多寡)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디 성품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것이겠다.

하지만, 그 계기(契機)는, 불교에서 이를 투기(投機)라 하는 그것은,

상당한 집중(concentration)을 필요하고,

이것이 어떤 곳, 어떤  순간 번갯불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기연(機緣)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富貴必從勤苦得,男兒須讀五車書。

(杜甫, 柏學士茅屋)


남아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이미 학교 다닐 때 배운 바 있다.


兩耳不聞窗外事,一心只讀聖賢書。


독서인(讀書人)이라면 창밖의 일에 대하여 두 귀로 듣지 않고,

다만 일심으로 성현의 책을 읽는다 하였다.


讀萬卷書,行萬里路。


만권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걷는다.


이 말은 여러 버전이 있다.

가령, 讀萬卷書不如行萬里路, 行萬里路勝讀萬卷書가 그것이다.

하지만 원래는 讀萬卷書,行萬里路。이게 원본이다.

게다가 이 말을 한 이도 여럿이다.

청대(清代)의 전영(錢泳)이나 양소왕(梁紹壬)의 글에도 등장하고,

그에 앞서 명대(明代)의 화가 동기창(董其昌)도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말의 최초 출전은,

아무래도 설원(說苑)에 나오는 炳燭夜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晉平公問於師曠曰:「吾年七十欲學,恐已暮矣。」師曠曰:「何不炳燭乎?」平公曰:「安有為人臣而戲其君乎?」師曠曰:「盲臣安敢戲其君乎?臣聞之,少而好學,如日出之陽;壯而好學,如日中之光;老而好學,如炳燭之明。炳燭之明,孰與昧行乎?」平公曰:「善哉!」

(說苑 建本)


“진평공이 사광에게 물었다.


‘내 나이 칠십에 공부를 하려니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싶소.’


사광이 답하여 아뢰다.


‘어찌 촛불을 밝히려 하시지 않습니까?’


평공이 말하다.


‘어찌 신하로서 임금을 놀리고 있소?’


사광이 말하다.


‘눈먼 신하가 어찌 감히 임금을 희롱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듣기에,

젊어서 호학은 마치 일출의 볕과 같고,

장년의 호학은 마치 한낮의 빛과 같으며,

노년의 화학은 마치 촛불의 밝음과 같다 하였습니다.

촛불의 밝음이 있는데,

그 무엇과 더불어 어두운 곳을 지날 수 있겠습니까?’


평공이 말하다.


‘좋구나!’”


이 책은 좀 다른 버전이 있는데,

이본(異本)엔 이리 이어지고 있다.


惟平生有三願:登萬重山,行萬里路,讀萬卷書。現行將退休,更要炳燭而行,要借炳燭之明,實現平生炳燭三遊之願。” 


“오로지 평생에 세 가지 소원이 있다.

만군데 산에 오르고, 만 리 길을 다니고, 만 권의 책을 읽는 것이다.”

장차 퇴위하면 다시 촛불로 길을 갈 것이다.

촛불의 밝음을 빌려 평생의 세 가지 소원을 실현 시킬 것이다.” 


여기 처음으로 讀萬卷書,行萬里路가 등장하고 있다.


다만 讀萬卷書不如行萬里路, 行萬里路勝讀萬卷書 이런 말은,

비교적 근대에 들어와 나타난 말에 불과하다.

萬官皆下品,唯有讀書高

만관은 모두 아랫 길이며,

오직 독서만이 높다.

고대엔 이리 공명(功名)을 좀 하찮게 여겼다.


하지만 讀萬卷書,行萬里路 이것을 서로 상하, 대립 관계로 볼 일은 아니다.

병립 관계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책도 많이 읽고, 경험도 많이 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이 모두는 제 인연에 따라 경중, 선후가 갈라지리라.


여기 시골에 농부가 하나 있어 이리 말하는 것을 들었다.

‘농진청 박사라는 이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한들,

실제 농사를 나만치 잘 지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는 바로 行萬里路勝讀萬卷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하여도 경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이다.


블루베리 농장 중에는 비법이라며 소금물을 용수에 타서 관수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블루베리는 염소를 극히 꺼린다는 것을 진작 밝혀냈다.

소금은 NaCl이고 이게 물에 녹으면 Cl 염소 이온이 당연히 해리된다.

내가 저 농부처럼 농사에 있어 行萬里路는 하지 못했을는지 몰라도,

나는 讀萬卷書를 하였기에 저 짓을 하지 않는다.


공부가 따르지 못하면 앞에서 말하였듯이 외눈박이 담판한(擔板漢)이 된다.

혹간 生而知之라 태어날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재주가 비상한 이가 있다.

이것을 두고 배울 필요가 없다 할 일도 아니다.

그러고서도 더 배움을 도타이 한다면,

보다 큰 성취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때문에 讀萬卷書勝行萬里路라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이는 行萬里路勝讀萬卷書처럼 어느 한 편에 서서 외눈을 감는 짓이다.

내가 이미 讀萬卷書를 하였지만,

여전히 밭에 나가 行萬里路하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혜능이 일자무식으로 깨우침을 얻었다 하여,

책을 멀리하고 배움을 전폐할 일도 아니요.

그렇다고 반대로 책이 만능이라 주장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이런 이도 있었다.


최표(崔儦)


每以讀書爲務,負恃才地,忽略世人。大署其戶曰:“不讀五千卷書者,無得入此室。”數年之間,遂博覽群言,多所通涉。

(隋書)


“매양 책 읽기에 힘썼다. 재능을 믿지 않고,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집무실 입구에 이런 문구를 써서 붙였다.


不讀五千卷書者,無得入此室。


‘오천 권을 읽지 않은 자는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수년에 걸쳐, 널리 책을 읽고 사람들의 말씀을 들어,

세상일에 통하는 바가 많았다.”


아, 일자무식 혜능이 깨우쳤다는 말씀처럼,

이 역시 얼마나 소름돋는 말씀인가?


재능이 뛰어난 이라면,

얼마 전 여기 나타난 어떤 이처럼,

그저 평생 만화책만 읽고도 한참 뻐길 수 있겠다.


하지만, 재능이 한참 부족한 나는,

不讀萬卷書,無得入此室。

이리 마음의 지게호에 붙여놓고,

죽을 때까지 책을 즐겨 읽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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