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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소요유 : 2019. 7. 21. 06:45


앞에서 쓴 글 ‘상옥추제’에선 사다리가 등장한다.

(※ 참고 글 : ☞ 상옥추제(上屋抽梯))

헌데, 노파심에서 이야기 하나를 마저 덧붙여두어야겠다.


어떤 이가 있어 사다리에 집착하게 되면,

행여 사다리 오르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할 수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폐단을 낳게 된다.

사다리란, 오르라고 만든 것.

헌데 이를 내치기만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는 영영 하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일, 사랑, 진리도 땅에서 이루고, 구하고, 펼쳐지는 것이라 한들,

하늘의 이치를 어찌 여읠 수 있으랴?

헌즉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그 근원에 이를 수 있는 법.


그래, 과연 그러한가?


반야바라밀다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빠라가떼(pāragate)

바라밀다(波羅蜜多, paramita)

도피안(到彼岸)

그래 여기, ‘피안(彼岸)으로 가자’ 할 때,

피안이 있으면 차안(此岸)도 있는 법.

차안에서 피안으로 갈 때,

뗏목을 타고 간다.


피안에 도착하면,

이제 뗏목은 필요치 않다.

허나, 뗏목을 타고서야 물을 건널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도 지적했듯,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피안에 도달하면,

뗏목은 필요 없는 법.


그렇다면,

과연 나중에 버릴 것일지라도,

사다리, 뗏목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인가?


그래, 과연 그러한가?


立一面已,彼天神白世尊曰:「友!卿如何度瀑流耶?」〔世尊曰〕:「友!我不住不求以度瀑流。」「友!卿如何不住不求以度瀑流耶?」〔世尊曰〕:「友!我住時沈,求時溺。友!我如是不住不求以度瀑流。」

(相應部經典, 瀑流)


“세존 한편에 서서,

천신 하나가 세존께 여쭈었다.


‘당신은 어떻게 폭류(거친 흐름)를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나는 머무르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폭류를 건넜습니다.’


‘벗이여! 

당신은 어떻게 하여, 머무르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면서,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구할 때에는 빠졌습니다.

벗이여!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구하지 않음으로써,

폭류를 건넜습니다.’”


아,

세존은 결코 뗏목을 구하지 않았음이라.


太7:7 你們祈求、就給你們.尋找、就尋見.叩門、就給你們開門。 

太7:8 因為凡祈求的、就得著.尋找的、就尋見.叩門的、就給他開門。 

(馬太福音)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아아,

이 말씀처럼,

사이비 목사에 의해,

오도되는 것이 또 있을까?


기복주의에 찌든 가여운 신도들을,

이 말씀을 앞잡이 세워 갈취하거나,

욕망의 폭주 열차를 탄 이들을 격동시켜,

이 말씀에 취하게 하여,

가짜 목사는 신도들의 등을 치곤 한다.


착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천국의 문을 두들기기만 하여도 문이 열릴 것인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도,

구하면 무엇이든 이뤄질 것인가?


我如是不住不求以度瀑流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구하지 않음으로써,

폭류를 건넜습니다.’


부처의 이 말씀이 들리는가?


머무르지 않고,

구하지 않음으로서,

폭류를 건너는 저 도리를.


사다리는 없다.

뗏목도 없다.


헌즉,

비트겐슈타인은,

있지도 않은 사다리를 두고,

헛깨비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다리는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


뭐 별다른 말이 아니다.

결코, 오묘하고, 깊은 뜻이라도 숨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무문관(無門關)

二十九則 非風非幡


중 둘이 대론하고 있었다.


중 하나는 깃발이 흔들린다 말하자. - 幡動

다른 중 하나는 바람이 불 뿐이다. - 風動


이러고 있자,

혜능 스님이 말씀하셨다.


깃발도, 바람도 아니고,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 不是風動不是幡動。仁者心動。


헌데, 무문관을 지은 무문혜개(無門慧開)는 이리 말씀하시고 계시다.


不是風動。不是幡動。不是心動。


風動도 아니고,

幡動도 아니며,

心動도 아니다.


아, 그러면 혜능도 틀린 말씀을 하신 것이란 말인가?


무문은 이제 心動을 마치 부적처럼 가슴팍에 넣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풋중들에게 죽비를 날린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무문 앞으로 또 다른 중이 나서서,

이리 말하였다면 어쩔 텐가?


‘風動도 아니고,

幡動도 아니며,

心動도 아니다.’

무문의 이 말도 아니다.


아아,

부정의 부정 ...

(※ 참고 글 : ☞ 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제일원인을 찾고 찾아들어가다,

그쳐 하느님, 신에게 귀착되면(convergency) 기독교가 된다.

헌데, 불교는 이와 정반대로, 

부정의 발산(發散, divergency) 형식을 통해,

피안으로의 접안을 시도한다.


허나,

부정n

역시 집착일 뿐인 것을.


我如是不住不求以度瀑流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구하지 않음으로써,

폭류를 건넜습니다.’


이 말씀 앞에 서면,

부처는 실로 놀랍도록 아름다운 인감임을 알 수 있다.


사다리는 없다n


사다리는 없다.

사다리는 없다는 없다.

....


이런 부정의 무한 형식 구조에 갇힌 한,

공안은 결코 깨지지 않는다.

도피안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역시 집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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