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
토리노의 말(馬)
1. 삶는다.
어느 날 농사 전문가라는 이가 일설을 펴는 것을 보았다.
하우스 재배 초보 농부를 대상으로,
그의 농사 방식에 강평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 중에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으니,
이를 이제 다시 끌어내본다.
낮에는 좀 삶다가, 햇빛이 들었을 때 열어가지고,
저녁에는 좀 삶다가 3~4시에 문을 닫는 거예요.
나는 그가 말한 삶는다는 말에 주목한다.
그가 겨냥한 작물 성장의 효과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삶는다는 표현의 밑에 숨은 마음보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포목(布木)을 삶는다든가, 나물을 삶는다 이를 수는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식물을 두고 삶는다는 말을 거침없이 발출하는,
그의 태도를 나는 지그시 응시하는 것이다.
그의 방법대로 따를 때,
식물의 성장세가 혹 클 수는 있다.
좁은 울에 가둬 동물을 키우면,
살을 찌어, 증체량을 늘릴 수 있다.
하지만, 크다고 모두 옳다고만 할 수 없다.
태양 불에 삶을 정도가 된다면,
식물은 그런 환경 하에서 결코 편안치는 못할 것이다.
이런 가혹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식물은,
마치 채찍을 맞으며 수레를 끌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소처럼,
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로써, 우마차 주인은,
건너편 마을에 물자를 수송하고,
돈을 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필경,
돌아오는 길,
산모퉁이에 외로 틀어앉아,
빛바랜 주기(酒旗)가 펄럭이는 주막집에 들리리라.
걸쭉한 탁배기 마시며,
뻘건 무깍뚜기를 썩 베물어 먹으며,
빨간 연지 찍어 바른,
허연 작부 허벅지를 주무르며,
누런 이빨 드러내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게트림을 할 수는 있으리라.
여기, 그의 작법 태도를 지켜보면,
기능, 효율 지상주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더 이상,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토리노 광장 한 구석에 그대로 멈춰선 말.
화가 난 마부는 채찍으로 말을 마구 후려친다.
그 광경을 목격한 니체는,
달려가 말의 목을 잡고,
통곡을 하다 쓰러진다.
그리고 니체는 미치고 만다.
(영화 토리노의 말 : 사람들은 말 등에 멍에를 얹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눈에 눈가리개를 씌운다.
이러고서야 마부는 제 삶을 구차하게나마 꾸려간다.
기실, 따지고 보면, 말이나 마부나 모두 삶의 노예임엔 다름이 없다.)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저항, 거부, 반역엔,
저 말처럼 처절한 시련과 고통이 따른다.
나의 을밀농철은,
오늘, 여기 조그마한 농장에서,
저 토리노의 말을 기억해낸다.
말(馬) 그리고 블루베리, 고추, 들고양이들을 보며,
나는 니체의 힘의 철학을 상기한다.
엉엉 울다, 그만 미치고 만 니체.
철학이 현실을 마주할 때,
토리노의 말처럼 가혹한 채찍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미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현실에서 미제(未濟)로 남겨놓았다.
을밀의 농사는 미제이나,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미치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철저하지 못하다는 말일 수도 있고,
그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통곡하고 만 니체, 그리고 채찍을 견디는 토리노의 말.
이들을 생각하며 나의 차크라(chakra)를 응시한다.
2. 쩔다.
농민들은 비료, 농약에 한껏 마음이 경도(傾倒)되어 있다.
해가 바뀌면 비료를 장만하느라, 마음이 분주하다.
농부 하나가 있다.
쇠똥을 몇 마차 받고서는,
허연 이빨 드러내며 잔뜩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린다.
밭에 욕심껏 부려놓고는,
이도 부족하여 화학비료도 듬뿍 뿌린다 자랑한다.
마침내 고추 모종을 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랗다 못해, 검푸른 잎을 내며, 고추가 불끈 올라온다.
아직 어린 유체인데도, 얼핏 장정처럼 씩씩해 보인다.
허나, 그는 곧바로, 밭둑에 앉아,
잿빛곰팡이병, 흰가루병을 염려하며,
농약 칠 궁리를 튼다.
아마 그는 바로 총채, 담배나방, 진딧물을 걱정할 것이다.
이어, 탄저병, 역병, 세균성점무늬병, 바이러스, 풋마름병을 막을 계획을 틀 것이다.
그의 마음 주머니 속엔 시름이 끝없이 솟아난다.
현대 농법에 길든 농부는 모두들 하나같이,
쩔어 있다.
비료, 농약에.
(※ 참고 글 : ☞ 질소)
저들은,
사물을 분절하고,
식물을 환원하여 N, P, K로 그저 보고 만다.
(※ 참고 글 : ☞ 환원주의(reductionism))
저들은 피, 땀, 고통, 운명을 모른다.
세상을 Justus Freiherr von Liebig가 내세운,
저 천박한 문법만으로 해석할 뿐이다.
아니, 그것은 해석이 아니다.
그저, 남이 제시한 길을 따라 달려갈 뿐이다.
세상의 모든 노예는 주인을 거부해야 한다.
강아지 역시 제 등을 쓰다듬는 주인의 손등을 물어야 한다.
고양이는 강아지와 다르게, 주인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는 토리노의 말에 보다 가깝다.
거부하라.
세상의 모든 억압받은 노예들은,
데바닷타(提婆達多, Devadatta, 제바달다)의 반역하는 법을 배워두어야 한다.
아니 저것이 기실 반역인지, 아니지도 모른다.
반역은 이긴 자가 노예에게 씌우는 주홍글씨이기 일쑤다.
(※ 참고 글 : ☞ 알 수 없다.)
헌데, 글을 마치려니 니체가 미치고 만 비극에 회한이 남는다.
동양에선 미치지 않는다.
다만 미친 척 할 뿐이다.
호도노인(糊塗老人)처럼,
거꾸로 세상을 속인다.
(※ 참고 글 : ☞ 난득호도(難得糊塗))
(※ 참고 글 : ☞ 바보와 은자)
그 뿐이 아니다.
때론, 세상을 깊이 아는 이가 나타나,
미친 척 하는 이를 용서하기도 한다.
게임의 법칙을 아는 멋진 군자가,
고단한 삶을 위무(慰撫)하며,
세상을 관조한다.
한편,
호도노인이 아니면,
굴원(屈原)처럼,
스스로 멱라(汨羅)에 투신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 참고 글 : ☞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동양 철인들은 미치지 않는다.
세상을 속이든가,
아니면,
세상을 등지고 만다.
굴원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가를 거닐 때,
어부 하나가 놀라 묻는다.
子非三閭大夫與?何故至於斯!
“아니, 삼려대부님이 아니십니까? 어떻게 해서 이 지경에 이르셨는지요?”
그러자 굴원이 답한다.
舉世皆濁我獨清,衆人皆醉我獨醒,是以見放!
“세상이 모두 흐려있는데 나 홀로 맑다.
모든 사람이 취해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
그런 까닭에 이리 추방되어 있다네.”
굴원은 미치지 않는다.
다만, 멱라강에 투신하여,
물고기 밥이 되길 택한다.
개자추(介子推) 역시,
면상산(綿上山) 속에서 불에 타죽는 길을 택하였다.
(※ 참고 글 : ☞ 개자추(介子推)를 생각한다.)
오늘 날 사람들은,
굴원을 기려 단오절을 쇠고,
개자추를 사모하여 한식절을 지낸다.
자신들의 삶이 그를 따르지 못함을 속죄라도 하듯이.
아니, 이로써 값싸게 면피(免避)하려 함에 가까운 게 아닐까?
온 세상이 누렇게 떠있어도,
다만 우리 농장만은 봄풀이 파릇하구나.
(※ 오늘날 들녘은 농부들이 풀 한 포기 하나 용납하지 않기에,
봄이 되어도 푸른 기가 돌지 않고 누렇게 떠있다.
짐짓 꾸민 과장이 아니라, 실제 오늘의 현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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