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품이기(稟異氣)

소요유 : 2021. 12. 2. 19:12


춥다.
 
고양이 녀석들 이 추위를 어찌 견디려는지?
천지불인.
동물들의 삶은 너무도 아프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고, 
그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태어났으되 빨리 죽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박상륭은 '죽음의 연구'에서 이리 말했다.

"'나거든 죽지 말고, 죽거든 태어나지 마라.'"

이 양자의 말은 다른듯 싶지만,
기실 큰 차이가 없다.

박상륭이 나거든 죽지 말라 이른 것은,
죽으면 다시 태어날 것을 염려한 것이지,
살아 큰 영예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리라.

헌데, 진인은 翛然而往,翛然而來라 하였음인가?

古之真人,不知說生,不知惡死;其出不訢,其入不距;翛然而往,翛然而來而已矣。不忘其所始,不求其所終;受而喜之,忘而復之。是之謂不以心捐道,不以人助天。是之謂真人。
(莊子)

‘옛 진인은 삶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랐다.
세상에 나오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죽음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가고, 
그저 무심히 올 뿐인 것을.

삶의 뿌리가 자연에 있음을 잊지 않고,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하여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주어진 생을 누리다가, 
죽을 때는 일체를 잊고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는 도를 해치지 않고, 
억지로 인위(人爲)로 하늘을 돕지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진인이다.’

여기 농장에 들어와,
죽어간 아이들을 그 동안 근 마흔은 땅에 묻어준 셈이다.
(※ 참고 글 : ☞ 불한당(不汗黨) - 이 以來)

봉신연의(封神演義)를 보면,
절교(截敎), 천교(闡敎)의 대립이 그려져 있다.
천교는 대부분 인간 출신이고,
절교는 동물이나 사물의 정령이 인간으로 변한 요괴, 요마들로 이뤄진다.
결국 신선은 인간이란 다리를 거쳐야 도달하게 된다.

신선가학론(神仙可學論)이라 하여,
대승불교의 불성론처럼, 누구라도 수행하면 신선이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봉신연의에선, 절교와 천교의 대립에서 보듯,
稟異氣이라, 실로 신선이 될 기품은 애초부터 차이가 있다.

그러하니 내 저들에게 가르치는 바는,
혹여라도 인간을 꿈꿀까 염려가 되는 것이다.

절교↔천교의 대립은,
실인즉 은(殷)↔주(周)의 대립으로 환치되는데,
은을 거꾸러뜨린 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절교 무리들은 稟異氣라 결코 도를 이룰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봉신연의에선 종국에 이들 양자가 화해하는 식으로 꾸며지지만,
주도 나중엔 열국으로 쪼개지지 않던가?

신선도 저리 싸움박질로 생을 지새우지 않던가?
그러함이니,
내 저들 고양이에게 타이르는 것이다.
인간도, 신선도 꿈꾸지 말라고,

죽은 고양이를 묻으면서, 
나는 그들에게 이리 이른다.

"행여라도 사람으로도 다시 태어나길 꿈꾸지 말지라.
아저씨 말을 믿을 일이야."
 
시들은 낙엽 하나가,
발치에 떨어져 바람 따라 저 멀리 흘러간다.

인연에 따라,
전의 내 글을 다시 내 마음의 우물에서 길어 올려둔다.

***

let it be(隨緣)




내게 은인(恩人) 한 분이 계시다.
은인이라 하니,
무엇인가 내가 신세를 졌다든가, 내게 큰 도움을 주신 분인가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은인이란 말을 이리 새기면, 
무엇인가 주고받는 대가 수수 관계가 연상이 되며,
종국엔 은인을 욕되게 할 우려가 있다.
도대체가 무엇을 주었고, 받았기에 은인이라면,
그럼 그 무엇이든 간에 주고받지 않으면 은인이 되지 않는가?


그래, 은인이란 그저 은혜(恩惠)로운 분 정도로 새기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햇빛은 해(日)가 준다는 마음 없이 우리 인간에게 자애롭게 내리며,
인간은 받는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누린다.
이를 나는 ‘은혜롭다’ 이리 새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달빛이 대지를 어루만지듯,
은인은 나를 지켜보시다 그리 따사한 눈길로 은혜를 내리신다.


그런데, 햇빛이나 달빛을 은혜롭다 여기는 이가 그리 흔한가?
해나 달도 귀하지만, 그리 느끼는 이 역시 드물다.
이리 볼 때, 
은혜란 지극히 사적인 경험내지는 체험의 영역에서 발현되고,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가령 이게 공적(公的)이든가, 집단적인 경험이 될 때,
이를 은혜가 아니라 강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적 체험의 깊이라든가, 간절함은 사적인 경우와 사뭇 다를 것이다.
공적 영역에 놓여지면 책임이라든가 부채 의식은 나눠지고, 찢어져,
무게가 가벼워지고, 긴밀한 관계가 풀어져,
전체적인 감정의 농도가 희석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은혜는 사적인 사건이 될 때,
그 내적 구조는 밀주(密酒)처럼 은밀해지고,
내용은 순례(醇醴)처럼 농밀해진다.


은혜와 대척에 선 원수 역시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그게 시간을 밟아 가며 현실에서 펴지는 사건 전개 과정이랑,
이 가운데 내동댕이쳐진 한 인간이 겪는 감정의 변화 모습은 서로 다름과 같음이 있다.
전자는 술국처럼 세월이 가며 농밀하니 익어간다.
반면 후자는 극적으로 생겨, 시간이 가며 원(怨)과 한(恨)이 깊어만 간다.
 
엣 말씀에 君子報仇,十年不晚。이라 하였다.
이를 ‘군자가 원수를 갚는데, 십년도 늦지 않았다.’ 대개는 이 정도로 해석한다.
이는 좀 뜨뜻미지근한 이해다.
내가 이를 보다 또렷하게 해석을 해본다.


‘군자는 원수를 갚는데, 결코 조급히 서두르지 않는다.’


이것은 ‘두고 보라지’ 그저 단기(短氣)로 내지르는 말과도 또한 다르다.
원한을 금석(金石)에 새겼으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까짓 금세에 못 갚으면, 내세에라도 갚고 말리라.
이런 각오이니 무엇이 급하랴?


원수를 갚는 데는 기한이 없다.
그 복수의 뜻만 가지고 있다면,
갚을 때까지 십년이든 백년이 되든, 
기회를 엿보며, 때를 기다릴 일이다.
이게 十年不晚이 갖는 함의(含意)다.


一飯之德必償, 睚眦之怨必報


사기(史記)의 범수.채택 열전(范睢蔡澤列傳)에 실려 있는 고사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다.
(※ 참고 글 : 애자지원필보(睚眦之怨必報))
범수(范睢)는 위제(魏齊)로부터 받은 수모를 갚기 위해,
질기게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닦았다.


사람들은 원수는 쉬이 잊지 않는데,
은인은 곧잘 잊고 만다.
하여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법이 아니다.’란 속언이 생겼는가 보다.
은혜를 부담으로 생각하는 한,
갚을 책임이 따르며,
이는 내내 자신을 구속한다.
하여 그를 피해 역으로 도망가려 한다.
급기야, 시간이 흐르면 도타웠던 후은(厚恩)도 얇게 나달나달해지고 만다.


내 은인께선 노년에도 전공인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 산중(山中)에서 비틀즈의 let it be를 두고 말씀을 하나 내려 주셨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let it be’를 ‘그냥 그것대로 내버려둬’ 이리 바꿔 말했다.
그러자 당신께선 그것은 그게 아니다 이리 말씀하셨다.


당시는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잊고 말았다.
산중에서 장수 막걸리를 먹고서는,
정신 줄을 놓고 선경(仙境)을 헤맨 결과다.


그래 이 노래를 들을 적마다,
해주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아직도 그 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 분께 여쭈어보려도 그분께선 이미 세상에 아니 계시다.


그래 우선 답답한 심정에 내 식으로 풀어보기로 하였다.
잠정적으로.


let it be


우선 be를 보자,
동사 다음에 보어라든가 목적어가 놓여져야 할 터인데,
be 다음엔 아무 것도 이어지지 않는다.
동사는 크게 동작과 상태를 나타낸다.
be 동사는 그 자체로는 동작이 아닌 상태를 지시한다.
물론 이게 피동태로 쓰이면 그 때에는 동작형태소로 기능할 수도 있다.
가령 let it be done. 이런 경우라면 done이 생략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리 볼 때,
let it be는 동작, 상태 그 어떠한 것으로든 쓰여질 수 있다.


let


이 단어는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시키는 사역동사(使役動詞)이다.
그러니까 흔히 하듯이 let it be를 ‘내버려둬’라고 할 때,
상대가 제 본성대로 그냥 그렇게 있으면 그만인데,
여기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왜 필요한가?
이 말을 뱉는 순간 제 말의 뜻을 전격 배반하며,
도리어 남에게 참견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it)을 존중한다면,
‘내버려둬’란 말조차 나올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제 스스로의 자성(自性)의 여여(如如)한데,
외부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일이 어디에 있음인가?


따라서 let it be 이 말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린다면,
차라리 隨緣 이 말이 외려 더 적합하다.
‘인연을 따르라.’
이 말은 앞의 말과는 사정이 다르다.
상대를 건드리지 않고, 좇을 뿐이다.


it


이것은 他 즉 상대를 일컫는다.
이게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사물 나아가 자연물 전체를 아우를 수도 있다.
또한 화자인 자신까지도 이에 포함된다.


그러니깐,
隨緣
인연을 따른다는 말은,
상대를 존중하거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을 기독교식으로 풀이하자면,
‘주님의 뜻에 따라’
이리 해볼 수도 있다.


한편, let it be를 隨緣이라 하여도 좋지만,
나는 최종적으로는 無爲내지는 無相으로 풀고 싶다.
작위(作爲)나 유위(有爲)가 아니라,
사물의 자성(自性)을 관조(觀照)하며,
근심, 걱정을 잊고 그 안에 잠기거나 또는 안기는 모습을 연상해낸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원망(願望)하면 상(相)을 내게 된다.
대개 이 때엔 미간이 좁혀지며 주름이 생긴다.
마음의 그늘이 얼굴에 상을 그리게 된다.
무상, 즉 상이 없다함은,
굳이 무엇인가를 원망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 경지에 들면 어떠한 경우라도 미간에 주름이 잡히지 않을 터이다.
無相은 그래 萬相으로 변할 가능성을 가진 (potential) 모습으로,
그저 담담히 그 자리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let it be


여기 let이란 단어는 let it be가 지시하는 그 말뜻을 실은 거스르고 있다.
해서 나는 이 말보다는 隨緣, 無爲, 無相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내 은인 선생님이 가시고 아니 계시니,
여쭙고자 해도 여쭐 수가 없다.
허니 이리 홀로 어줍지 않은 도리를 펴고 있구나.


隨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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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21. 12. 2. 1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