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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과 조달

소요유 : 2021. 5. 20. 17:36


틱톡과 조달

틱톡이란 것을 잠시 보다가,
한 감상이 떠올랐다.

유튜브의 경우,여기에 자극을 받아,
최근 shorts란 유사한 것을 채비하였다.
등록 동영상을 60초로 제한하였은즉,
마치 snapshot처럼 한 순간을 절취해내되,
조금 숨을 더 붙여,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틱톡流는 흡사 단말마(斷末摩)의 비명 같은 것.

刹那生 
刹那滅

그저 현 순간 그리 내지르며 명멸(明滅)하는 것.
이게 현재 저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문법이다.

하지만,
거긴 저 지하 갱저 암반에 터한,
깊은 구조물에 대한 이해는 부재하다.
이런 기초 없이 내지르는 주먹질은,
한 때, 일시, 순간,
주목을 끌 수는 있지만,
다음을 담보할 수 없다.

틱톡 문화는,
일정분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힘의 원천, 작동 기초까지,
덤으로 설명하려 드는 것은 위험하다.

스마트폰.
이것 개나 소나 다 사용한다.
그래 지가 스마트인간 줄 안다.
쥐뿔도 없는 것들이.

이로써,
틱톡을 즐길 수 있지만,
막상 저 개발자들도,
스마트폰 전모를 다 알지 못한다.
저 기술적 기초 내용이란,
실로 넓고도 깊어,
개인이 모두 다 아지 못한다.

틱톡은 마치,
파도 위의 거품 같은 것.
一切有為法,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모든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거품과 같나니,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금강경의 말씀이다.

틱톡은,
설혹, 아무리 짜릿해도,
파도 위 포말과 같은 것.
파도 아래 바다의 비밀을 뉘라 알 수 있으랴?

(utube, POINT BREAK, 폭풍속으로)

그러한즉,
틱톡으로 현실을 어설피 재단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결코 그 작동 원리, 내밀한 비밀에 접근해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함이니,
틱톡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파도 위 메시지가 한껏 떠 놀지만,
그 밑엔 힘의 원천, 이야기의 구조 비밀이 숨어 있다.

틱톡 따위로써,
감히 저 지하 갱저, 빙하 밑,
구조물, 구조의 전모를 알 수 없다.
아니, 저들은 굳이 알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재를 소비하고, 즐길 뿐이다.

서핑(surfing)하면서,
그 누가 있어 파도 밑, 해양, 그리고 해저를 탐구하려 하랴?
다만, 짜릿함을 즐기면 족한 것이다.

파도의 본 파동도 아니고, 
잔물결(ripple)에 탐닉하고,
순간을 불사르고,
다시 다른 ripple에 몸을 맡기고,
그와 함께 스스로 산화(散華 or 酸化)하고 만다.

마치 춤바람 난 인간이,
조금만 틈이 나도,
돌쟁이 아기도 내팽겨치고,
조르르 카바레로 달려가듯,
저 붉은 불꽃에 한 마리 나방되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만다.

세상 사람들은 안달이 나서,
더는 지루한 것을 참아 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두꺼운 책, 긴 글은 더이상,
세상 사람을 이끌어낼 수가 없다. 
아마도, 저들의 뇌세포는 점점 줄어들어,
미구에,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로 진화할 것이다.

틱톡 따위는 바로 이런 삶의 형식이 아닌가 싶다.
하루살이처럼, 전일(專一)하니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그것밖에 달리 구할 것이 있는가?
기실, 그 밖에 무엇이 있는지 그 누가 알리?
이 물음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저들은 짧디짧은 그래 바로 그 찰나에 몸을 맡긴다.
하나외 더는 뇌세포가 많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기우(杞憂)는 하늘이 무너질 것을 매양 염려하여,
전전긍긍하였다.
틱톡族을 앞에 두자, 나는 바로 이 기우가 떠올랐다.
매양 하루를 걱정하느니,
틱톡族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 참고 글 : ☞ 기우(杞憂))

尾生與女子期於梁下,女子不來,水至不去,抱梁柱而死。

미생은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여자가 오지 않는데, 물은 불어 오르지만, 물러나지 않고,
끝내 다리를 껴안고는 죽었다.
(※ 참고 글 : ☞ 몰카와 상은(相隱))

과연, 틱톡族이 미생지신(尾生之信)을 알기나 할까?
아니, 틱톡族에게 믿음을 구하려 하는 것조차,
도대체가 염치가 없는 짓이리다.
저들은 믿음의 영역에 사는 이들이 아니다.
다만, 오늘을 열심히 연소시키는 일에 종사할 뿐이다.
저들에게 신(信)이나 인(仁)을 구하려 함인가?
순간에 충실한 이들에게,
믿음이란 차라리 환란을 일으키는 악이며,
仁이란 타자를 향한 쓸데없는 낭비가 될 터이다.

Don't Be Evil(사악해지지 말자)
이랬던 구글조차 틱톡을 따라 shorts를 만들고 있다.
세상은 이제,
한껏 ripple에 몸을 맡기며,
찰나를 연소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刹那生
刹那滅

헌데,
기억할 일이다.
저 ripple 아래 본 파동이 있으며,
그 아래 거대한 해양이 있고,
또 그 아래엔 해저가 있음을.

이를 지키는 이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들에 의해 세상은 지켜지고,
천장지구(天長地久)라,
천지가 장구하니 이어지고 있는 바임이라.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메시지, 내용은 매체 형식에 매여있다.
맥루한(McLuhan)도 'the medium is the message.'라 하지 않았던가?
1964년, 그는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
첫 장에서 이리 갈파하였다.
그러한즉, 차라리, 매체가 메시지를 규정하고 만다.
틱톡이란 형식 조건이,
사람들의 의식 경향, 삶의 태도 나아가 내용까지 간섭하게 된다.

이제,
제바달다가 생각난다.

틱톡族에게, 
아니 게임광이라도 좋고, 
그 어떠한 이들이라도 상관없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글을 마친다.


世尊因調達謗佛。生身入地獄。遂令阿難問。你在地獄中安否。曰我雖在地獄。如三禪天樂。佛又令問。你還求出否。曰我待世尊來便出。阿難曰。佛是三界導師。豈有入地獄分。調達曰。佛既無入地獄分。我豈有出地獄分。
(指月錄)

“세존께서,
조달(調達)이 부처를 비방한 죄로 인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는데,
아난을 보내 물었다.

‘당신은 지옥에서 편안한가?’

답하여 이리 말했다.

‘내가 비록 지옥에 있지만,
삼선천(三禪天)의 즐거움과 같습니다.’

부처가 다시 아난을 시켜 물었다.

‘당신은 다시 지옥에서 구해지길 바라는가?’

답하여 이리 말했다.

‘나는 세존을 기다리다, 오시면, 나가리다.’

아난이 말하였다.

‘부처는 삼계의 도사(導師)이거늘,
어찌 지옥에 들어오시겠습니까?’

조달이 말했다.

‘부처가 이미 지옥에 들어올 까닭이 없다면,
내 어찌 지옥에서 나갈 까닭이 있겠습니까?’”


조달은 달리 제바달다(提婆達多, 데바닷타)라고도 하는 이인데,
세존을 해치려 하다 파문을 당한 이이다.
(※ 참고 글 : ☞ 알 수 없다.)

(출처 : 網上圖片, 推山壓佛)

악의 바깥에 선이 있는가?
선의 바깥에 악이 있는가?

그대 당신이 틱톡族이라면,
제바달다의 추산압불(推山壓佛)을 배워둘 일이다.

지옥에서도,
당신은 거기 주인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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